▲ 서 헌 철 목사

후배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있다. 친구 목사의 전언에 의하면 교회 개척으로 지칠 대로 지쳐가는 상항에서 아내의 멸시, 무시, 모멸감에 힘들었을 때에 다정다감하며 성품이 좋아 보이는 홀로 된 여집사에게 그만 마음이 끌려 선을 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아내의 고소로 그 여집사와 목사는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후배 목사는 목회 길을 포기하더라도 아내에게 사과할 마음은 없고, 형기를 마친 후에는 그 여집사 새 출발을 하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당시는 ‘간통죄(姦通罪)’라는 것이 있을 때이지만, 너무 답답해서일까? 참으로 오래전 이야기 임에도 생생히 기억이 지워지질 않는다.

‘박원순’ 시장이 10일 숨진 채 발견되자 의견이 분분하다. 장례절차를 두고도 이견으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생명에 비견 될 수 없으며, 목숨을 포기하는 이들의 고통 역시 그 어떤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머나먼 길을 향한 발걸음은 천근만근 맨발의 발걸음이 아니었을까? 가슴엔 폭포가 흘러넘치고 온몸은 피멍으로 가득한 고통 속에 앞이 보이질 않는 등산길,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하며, 무거운 발걸음이었을까? 무슨 죄가 그리 크고 넓고 깊어, 목숨을 내려놓는 그 길을 꼭 가야만 했단 말인가? 그는 그 길 만이 국민에 대한 사죄(謝罪)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같은 당파가 아니라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모욕, 2차 살인 등과 같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그중엔 목사들도 있다는 것이 너무 서글프다. 생명을 존중하고, 영혼을 구원해야 하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청껏 외쳐대는 목사들이 어찌 그리도 참담한 말들을 쏟아낼 수 있을까? 목사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장례(葬禮) 때 만이라도 침묵할 수는 없었을까? 물론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장례(葬禮) 이후에 어떠한 의견이든 개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장(戰場)에서도 적장을 예우할 진데, 어찌 영혼 구원을 외치는 목사 등이 그리도 모진 말들을 쏟아내는데 조급해야만 했단 말인가? 조금만 참았다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교회에서도 경계대상은 단연 돈(錢), 성(性)의 문제이다. 그러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성추행이며 어디서 어디까지는 성추행이 아닐까? 어디서 어디까지가 성희롱이며 어디서 어디까지는 성희롱이 아닐까? 또한 금전(金錢), 설교(說敎) 등도 문제 삼으면 문제 될 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차제에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판단하는 말이 부메랑이 되어 교회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성(性), 돈(錢) 등의 문제로 많은 고소, 고발 사건 등이 발생 되고 있다는데 걱정과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 같이 항상 조심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지키며,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은혜를 누렸으면 한다.

“(1) ~ 실족(失足)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者)에게는 화(禍)로다 (2)저가 이 작은 자(者) 중(中)에 하나를 실족(失足)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硏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萬一) 네 형제(兄弟)가 죄(罪)를 범(犯)하거든 경계(警戒)하고 회개(悔改)하거든 용서(容恕)하라”(눅 17:1-10 등 참조)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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