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 음

수술대 위에 누워 본 적이 있는가
이름이 뭐예요
벌거벗은 나신에 믿을 거란곤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표본실의 청개구리한테
자꾸만 이름을 묻는다
다행이도 여자 마취사 선생이
진통제를 먼저 투여하고
“마취제 들어갑니다”
“편안하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납니다”
마취제가 혈관 속을 후끈 달구며 훅 들어온다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꺼져있는 둥근 수술대 조명을 따라
주마등처럼 돌아간다

약간 서럽기도 하고
강제로 잠든다는 것이 죽는 것만 같아
두려움에 희미해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고
괜히 헛기침도 해 본다
이제 믿을 거라곤 의사 쌤밖에 없다
무언의 약속 같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저승 밖으로 멀어져 간다

 -시집 『푸른 절망』에서
김규리 시인 ; 『조선문학』으로 등단(1998) 조선문학 작품상 수상

▲ 정 재 영 장로
우리말에 ‘에둘러’라는 말이 있다. 짐작해서 알아듣도록 둘러대는 것을 뜻한다. 시에서 볼 때 중요한 성격을 말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아주 적절한 말이 된다. 이 시의 시의 믿음은 수술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는 조건 즉 수동적아며 피동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다.

앞 연은 수술대의 환자의 모습과 두 번째 연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부득이 신뢰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들어 믿음의 속성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다. 믿음이란 약자의 속성이다. 의사 앞에서는 건강할 때 그 관계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환자로 판명되고 그것도 중환일 때 전문가인 의사를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어쩜 신과 인간도 대부분 마찬가지 아닐까. 수술대의 벌거벗은 모습이 신 앞에서 적신으로 서있는 인간 모습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모세가 절대 거룩함 앞에서 속세의 자유를 상징하는 신발까지 벗어야 하는 관계로 설정되는 성경 이야기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기 연약성을 알게 될 때 믿음의 입구로 들어가게 되는 이치와 같다. 그런 자기포기는 2연의 1행처럼 인간에게는 서러운 감정일 수도 있다. 인간은 절대자 앞에서 그냥 ‘헛기침’ 정도는 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마저 포기하고 의사 선생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이 바로 믿음이다. 작품 전체에서 강제로 잠들게 하는 마취를 통해 인간의 연약성과 절대자의 강력한 섭리와 구원의 손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을 보면서 시의 특성 하나가 떠오른다. 비가시적인 믿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각화하는 일을 형상화 작업이라 한다. 즉 시는 에둘러 형상화로 말하는 일로, 사물이나 상황으로 그 일을 대치한다. 이것을 비유라 한다. 또한 남이 사용하지 않았던 비유를 창작이라 한다. 그것은 체험(수술)으로 오는 상상(믿음과의 연결)으로만 가능하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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