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알렌은 25주년 선교대회에서 직접 출석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후임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에게 자세하게 “기록된 역사적 설명”을 보냈다. “인사말”에서 알렌은 불가능하게 생각되던 구한말 조선 땅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진행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비록 의료 선교사로 시작했지만, 분명히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로서 한국주재 미국 공사관의 담당의사직을 수행하는 특수한 전문 선교사였다. 알렌 선교사는 놀라운 선교 기반구축의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여 후배 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해서 문을 열어주는 업적을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서 한반도를 영적으로 새롭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육 간에 엄청난 축복을 가져다주었지만, 1884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던 시대상황에서 이루어진 기도의 응답이었다.

알렌의 소속기관이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후배 선교사들은 마땅히 그와의 관계성을 갖고 출발하였다. 이것은 알렌이 주재 선교사로서의 영향력과 지도력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활약은 초기 한국 주재 개신교 선교사의 역사의식에 각인되어져서 있었다.

다시 한번 더 중요한 자료를 살펴보자. 앞에서 필자는 알렌의 의료사역이 시작된 해로부터 25주년 대회를 1909년에 개최하였다는 자료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더 지나서, 한국 선교 50주년이 되는 해, 곧 1934년에도 성대하게 선교보고대회를 열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겼다. 알렌 선교사가 가장 먼저 들어와서 장기체류하게 된 첫 선교사였기에 역사적으로 중요시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으로 한반도 내에서 개신교 선교사역의 가능성을 정착시키는 획기적인 분기점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알렌 선교사의 업적과 공로에 대해서 오늘날의 잣대를 가지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부 언론인들, 역사가들, 목회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알렌의 한국내 활동이 완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선교사가 가장 효과적으로 전문인 사역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첫 걸음을 뗄 수 있도록 수고했다는 그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19세기는 세계 선교의 시대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 등 여러 나라는 중국, 인도, 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로 선교사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 가던 한반도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서구에서 온 분들에게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다. 정치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백성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으며, 일본의 침략으로 처절한 상황에 내몰려 있었다. 이런 나라에 들어와서 함께 살아준 초기 선교사들의 수많은 헌신과 희생에 대해서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초기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노고와 기도가 곧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1890년에 한국 주재 선교사들은 너무나 사역의 열매가 없어서 큰 시련에 봉착했었다. 수 년동안 노력해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너무나 낙심한 나머지 선교부의 철수를 건의할 정도였다. 젊은 선교사들은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았고, 큰 성과를 거두고 있던 선배 지도자를 초청했다. 의욕에 넘치면서도 실제적인 방법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던 후배 선교사들에게 선교적인 교훈을 달라고 중국 산동지방에서 활약하던 존 네비우스 박사 (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를 초대하였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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