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곤 목사.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이사야 32장1-4절),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이사야 32장16-18절)”

성서는 통치자의 자격에 대해서 교육하고 있다. 바른 통치자를 만나야 백성이 평안하고 안전하게 산다고 교육한다. 오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안전하고, 평안한가. 오늘 대한민국은 민주화된 나라라고 말 할 수 있나. 겉으로는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룬 나라 같이 보인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가 보면 그렇지 못하다. 박원순 시장 자살사건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어느 정치인은 “알바를 했는데, 사업장이 어려워져 사장님도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알바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가 국민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이 말 속에는 고용주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노동자를 구박하면서 고용주를 옹호하는 말로 들린다. 지도자는 백성을 위해 눈과 귀를 열려야 한다. 백성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맑은 귀를 가져야 한다. 국민들에게 화평을 주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척박한 땅과 기름진 땅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민주화됐다고 말하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화평을 주고, 정의롭게 통치를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국민의 아우성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를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하나님나라는 기름진 땅이나, 척박한 땅이나 동일하다. 정의가 이루어져야 평화가 있다.

지도자는 나라의 화평과 정의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높은 것이 아니라, 시중드는 사람이 높다고 했다. 제자들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 앞에서 자리다툼을 벌였다. 법을 이야기 하며, 이권다툼을 벌인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시중드는 사람 중 누가 높으냐”고 물으셨다. 오늘 교회는 교회의 사이즈로 목회자를 평가하고, 서열을 메긴다.

세속정치에 빠진 교회는 교회라고 말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시중드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고 계시다. 시중드는 사람의 나라가 완전한 나라이다.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모두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자리다툼을 벌인다. 그러다가 분열되고, 갈등만이 만연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도 연쇄적인 분열이 일어났고, 연합단체도 여러 개로 분열됐다. 모두가 자리다툼을 벌인 결과이다.

이들은 섬김을 받을 줄만 안다.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공동체의식도 없다. 그것은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로부터 섬김만을 받은 아이들은 노력도 않고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아 흥청망청 쓰기에 바쁘다.

한마디로 오늘 대한민국의 가정은 부모가 자식을 섬기는 세태가 됐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자생력도 없고, 언제든지 혼자이다. 그래서 나와 이웃을 섬기는 교육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시중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중들어야 할 지도자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을 시중해야 할 지도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받기를 원한다.

예장 합동총신 총회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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