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눅 17:5-6) 예수께서는 왜 ‘모래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했을까? 사람들은 으레 ‘겨자씨’ 하면 작다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겨자씨 이야기는 단지 작다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생명을 품고 있다는 데 있다. 한 우주가 그 안에 들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커도 생명이 없다면 쇄락의 길만이 있다. 예수께서는 큰 것을 위해 사신 분이 아니다. 생명을 품고 사신 분이다.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 모두가 생명의 기적들이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생명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당신의 육신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당신이 뿌린 생명의 씨앗은 지금도 발아해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헤롯대왕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보다 두 배나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지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헤롯이 무슨 일을 했는가? 큰일을 한 것은 맞지만 생명을 죽이는 일만을 했다. 예수께서는 헤롯에 비하면 겨자씨 한 알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의 은사론도 그래서 나왔다(고전 12:8-10). 우리는 이 말씀을 ‘은사의 다양성’이라는 차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모든 인간의 ‘사회적 평등’을 선언한 말씀이기도 하다. 바울의 은사론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표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따라” “같은 성령으로” “한 성령으로”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일은 무엇이든 자기 업적이 되고, 자랑이 되고, 불만이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야 기적을 일으키고, 공동체의 유익을 가져온다.

많은 이들이 겨자씨처럼 작지만 생명을 품은 믿음이 아닌 깜짝 놀라게 할 큰 기적을 일으킬 능력을 구한다. 그리하여 큰일들을 많이 하기는 하는데 썩은 냄새만 난다. 예수께서 겨자씨 이야기에 뒤이어 주인과 종의 예를 든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쓰시기에 불편하지 않고, 이웃이 나를 쓰기에 불편하지 않게 작아지고 낮아지기를 바라서이다. 내가 작아질수록 기쁨은 커지고 믿음도 자란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지만 생명을 품은 믿음이라야 기쁨이 있다. 생명을 품은 믿음이라야 기쁨이 있다. 큰 믿음, 큰 능력 구하지 말자. 그보다는 용기 있는 믿음을 구하자. 다름을 받아들이는 믿음, 세상이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 말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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