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은유

달빛이나 담아 둘까 새로 바른 한지창에
누구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행렬인가
기러기 머언 그림자 무단으로 날아들고

따라 놓은 찻잔 위에 손님같이 담긴 구름
펴든 책장 사이로 마른 열매 떨어지는
조용한 세상의 한때, 이 가을의 은유여

개미취 피고 지는 절로 굽은 길을 가다
밑둥 굵은 나무 아래 멈추어 기대보면
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 


▲ 문 현 미 시인
하늘이 점점 더 높푸르고 공기도 더 맑고 선선해지는 가을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런 멋진 계절에 가을 바람 소소히 부는 들길이나 산길을 걷고 싶다. 하지만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가을이 오는 소리와 모습을 잘 표현한 시를 통해서 작은 위로를 받는 것은 어떨까. 유재영 시인은 격조 있는 시와 시조를 쓰는 작가이다. 원래 이 시는 제목이 “은유로 오는 가을”이었는데 나중에 “가을 은유”로 바뀌었다. 시에서 은유는 매우 중요한 수사 기법이다. ’그대는 아름답다‘라는 직설적 표현 대신에 ’그대는 장미‘ 또는 ’그대는 코스모스‘라는 은유적 표현이 훨씬 더 함축미가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시조로서 3수의 연시조 형식을 띄고 있다. “가을 은유”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각 수마다 가을이 지닌 이미지를 시인의 깊은 사유를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로 바른 한지창에 어리는 달빛을 기러기 날아가는 그림에 비유한다든지, “찻잔 위에 손님 같이 담긴 구름”, “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는 비유를 통해 독자를 가을의 고요 속으로 이끈다. 얼마나 몰입을 해야 “마른 열매 떨어지는 조용한 세상의 한때”를 천착할 수 있을까. 가을이 와도 가을인 줄 모르고 사는 어수선한 세상에서 좋은 시 한 편으로 인해 가을이 오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가을이다. 부디 닫힌 가슴의 문을 살며시 열어 보시기를!

백석대 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