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인간은 누구나 가다가 힘들면, 쉽게 포기한다.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의 결말은 훤히 보인다. 우리 속담에 “가다가 못가면 아니 간만 못하다”는 속담도 있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포기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실패 할 것이 훤히 보이는데, 앞만 보고 가는 것은 문제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서 닥치는 유혹을 포기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나라에서 큰일을 할 수 있다.

요즘 세상은 모두가 탐욕에 길들여져, 아니 유혹에 쉽게 넘어가 세상을 혼란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도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인간은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이로인해 변종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출몰하고 있다. 인간세상의 혼란과 고통은 한마디로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멈추지를 않고 있다.

보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희극' 연작을 발표한 오노레 드 발자크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포기>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포기했기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미래, 새로운 나라를 갈망 할 수 있다.숲 속에 사는 흰 담비는 추운 겨울을 좋아한다. 여름 동안에는 갈색이던 담비의 털이 겨울이 되면 새하얗고 아름답게 변한다. 그런 흰 담비에게 족제비가 걱정되어 말했다.

“아무리 네 흰털이 아름다워도 목숨보다 귀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흰 담비는 족제비가 자신의 아름다운 털을 질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족제비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흰 담비는 살쾡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흰 담비는 살쾡이를 피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힘을 다해 달아나던 흰 담비 앞에 진흙탕이 나타났다. 달아나기 위해서는 진흙탕 위를 뛰어가야 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털이 더럽혀질 것으로 생각한 흰 담비는 그만 진흙탕 앞에서 멈췄다.

그러자 쏜살같이 달려온 살쾡이가 흰 담비를 덥석 물어가 버렸다. 결국 흰 담비는 자신에 아름다운 털의 멋을 <포기>하지 못해 살쾡이의 먹이감이 됐다. 흰 담비는 자신의 아름다운 털을 <포기>하지 못하고 더럽힐 바에는 차라리 잡혀 죽는다는 흰 담비의 생존방식이 이런 우화를 만들어 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아니다. 살아남아야만 새로운 미래를 도모 할 수 있다. 이것을 흰담비는 잃어버렸다.

자신이 자랑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과감하게 <포기> 할 줄도 알아야 더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 특히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도 버릴 줄 알고, 포기 할 줄 알아야 한다. 흰 담비의 우화는 오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의 사명를 세상의 유혹 때문에 망치고 있지나 않은가

한 번 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생각해 보자. 5달란트와 3달란트를 받은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1달란트를 받은 종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1달란트를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다가 심판을 받고 말았다. 성서의 달란트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하고 있지 않은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다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사회와 역사를 방관하지 않는가. 우리의 변명은 1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허구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책임의 회피이다. 이제라도 무게의 중심을 위로는 하나님에게 두고, 좌우로는 이웃에게 두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삶이 고달퍼지고 위험하더라도 용기있게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자.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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