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나그네(strangers)’는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거주하는 사람 곧 뜨내기이다. ‘행인(pilgrims)’은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으로 순례자이다. 모두가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사는 사람, 시민권이 없는 사람, 잠시 거주하기는 하지만 불원간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 곧 순례자와 다를 바 없이 사는 존재라는 게 성서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성서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과의 관련 속에서만 사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을 나그네나 순례자처럼 살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신적인 모국은 하나님 나라이다. 세상에 살지만 돌아갈 모국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세상은 우리의 전 존재를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육체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영혼까지 끌어 당겨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심하게는 인간성 자체를 파멸시키는 속성을 지닌 게 세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긴장 가운데서 불가피 내적인 싸움을 싸우게 된다. 그리하여 베드로서신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한다. “제어(ἀπἐχεσθαι/to abstain)”라는 말은 ‘제거하라’는 뜻이 아니다. 삼가하고, 멀리하고, 복종시키라는 뜻이다. 성서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질을 부정하지 않는다. 욕망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예속되고, 욕망에 예속되고, 물질에 예속되는 것만큼은 경계한다. 예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이유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 6:24)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한 쪽을 위해서 한 쪽은 해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둘을 조화시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예사롭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그런 선택과 조화의 권한이 있을 수 없다. 주인을 향한 종의 의무는 오직 신실함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종은 주인에게 신의성실의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재물은 자기 밖에 두어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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