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회적 책임 다 했는가

한국교회의 선교현장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교회를 세우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야 일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한 죄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는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구멍가게처럼 흔해져버린 교회가 해야 할 일이며, 예수님의 지상명인 세계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한궉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더 이상 속은 비었는데 겉은 요란다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교회가 인간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가중 시킨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이 모인 생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도체, 평등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서 기쁨과 보람을 얻는 공동체이다. 우리 삶 전체를 바치는 곳이다.

이제 한국교회, 아니 세계교회는 신장유주의 경제체제서 사회적 책임을 다했는가(?)에 대해서분명하게 대답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이끌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에 한국교회가 동화돼, 신의 자리를 맘몬으로 대치시켰다. 감신대학교 이정배 교수는 종교평화회의 평화포럼서 “자연은 자본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수탈과 정복의 대상(물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일 역사는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기독교화 시키지 못했고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주의화 했다”고 평가했다.

서구 기독교 문명국가라는 미국의 수장이 북유럽의 한 소녀 툰베리의 질타를 받는 현실은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생산 네트워크를 모두 멈춰 세웠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아우성친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코로나 이후 시대를 걱정한다. 지금처럼 살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한다. 인류가 쌓은 부(富)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현실을 경험하고도, 과거회귀를 기대한다.

이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수 십 만의 사람들의 목숨 값을 제대로 치룰 생각이라면, 우리는 다른 세상, 다른 문명을 꿈꿔야 옳다. 불확실성을 벗는 길은 지금껏 꿈꿔 왔던 인습화된 욕망을 비울 때 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 모두는 과거의 부를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도 만찬가지이다. 변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함에도, 70-80년대 성장의 시대를 꿈꾼다.

이제 한국교회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려야 한다. 너의 마음읋 열어 나를 받아드려야 한다.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리라는 과거의 기대도 버려야 한다. 세계가 축소되는 만큼, 교회도 거기에 맞게 선교전략을 세우고, 교회의 가치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성장 중심의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축소되는 사회, 축소되는 교회는 자신의 이익, 개교회의 이익이 아니라, 함께 생존하고, 교회를 지킬 수 있는 교회간의 연대가 절실하다.

▲ 절벽 같은 세상을 평평하게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 모두가 사는 길이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이웃교회와 연대해 함께 생존하는 선교전략 절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중요

절벽 같은 세상 평범한 세상으로

이제 한국교회는 이웃교회들과 연대해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선교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세계가 변하고 있는 만큼, 사회가 축소되고 있는 만큼, 교회가 고령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 맞게, 파괴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 할 수 있는 선교전략을 세우고, 건강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하는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주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교회는 조물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다’고 환호하는 세상을 만드는 전위대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이들의 사명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노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또한 종교는 문명의 전환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이를 앞서 실천 할 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경쟁력도 갖는다. 우리를 쟁으로 내몰았던 신자유주의, 일상을 지배했던 이기적 자본주의와의 이별을 ‘백사천난’(百死千難)한 과제라 여기며, 코로나 이후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지구온난화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재앙이다. 그것은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을 비롯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전염병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받아드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부르짖는 환경운동가와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지키기 위한 ‘혁명’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를 ‘코로나19 혁명’이라고 명명한 이들도 있다.

인류는 천지창조 이후 자유를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여왔고, 오늘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생명을 위한 혁명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코로나19혁명’을 ‘하나님의 생명을 위한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크게 변화됐다. 지구가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애기다. 인간들은 코로나19 이후 지구 온난화와 환경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에 교회도 참여해야 한다. 이제 교회와 인간은 절벽 같은 세상을 평평하게 되돌리려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서야 한다. 절벽 같은 세상을 평평하게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 모두가 사는 길이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성공회 이우송 신부는 “인간을 숙주 삼는 야생(자연)바이러스로 인해 세계가 펜데믹 상황에 이를 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보다 그 폐해가 훨씬 크다 하니 이제 인류는 자본세가 초래한 혹독한 결과와 마주하게 됐다. 체제변화 없이, 거대한 전환 없이 인류생존을 바라던 시기는 지나갔다. 뼈 속 깊이 자본화된 기독교 역시 자기 미래를 걱정해야 옳다. 인류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가 ‘코로나19’라는 재앙으로 다가왔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주의화

이 신부의 지적대로 역사는 문명의 발전과 함께 삶의 터전인 대자연을 파괴하면서 더 편리하고 화려해졌다. 인류역사상 지구촌을 패닉 상황으로 몰고 간 ‘코로나19’의 등장은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훼손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재앙이다. 인간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해 혼란과 고통 속에 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최첨단 문명이 절대 대자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강행해왔다. 이는 이겨도 지는 전쟁이었다. 그동안 인류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 받은 수많은 예언자들에 의해, 그리고 미래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경고와 호소는 환경파괴의 강도만큼이나 거듭되었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지구촌의 환경운동도 해를 거듭하며 일어났다. 환경단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활발한 황동을 벌였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결탁된 국가권력은 애써 이를 무시했다. 소비를 부추기고 자본가에 낚여 소비자들의 편리함의 추구는, 스스로가 그간의 경고를 무시하고 위기를 자초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교회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 역시 자본가에 묶여 맘몬을 노래하며, 예언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 때 기도원 및 수양관을 건축한다며,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이탈해, 교리와 제도를 내세워 인간세상의 혼란과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렇다 보니 교회는 자신들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데 무게의 중심을 두었다. 무게 중심을 자신에게 둔 결과 한국교회호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예수천당’, ‘구원’만을 외치며, 교인들을 미혹시켜 왔다. 한마디로 천상의 삶만큼,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도,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공동체를 철저하게 악용하고 있다. 이들은 특권을 누리기 위해 주도권을 잡아 볼 속셈으로 교회는 나오는 사람이다. 근본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이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이다. 너를 받아드릴 수 없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의 공동체는 닫힌 공동체가 됐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보다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일한다.

그것은 오늘 자신의 교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분열과 갈등을 일삼는 교회 내 정치꾼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다툼의 현장만 보인다. 분열하는 모습만 보인다. 세상법정에 고소고발 하는 꾼들만 보인다.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이들에 의해 교회는 혼란과 고통 속에 있다. 하나님은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분명 교회가 있어야 할 곳에, 교회가 세워져야 할 곳에 세우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마디로 오늘의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초기 한국선교에서 이탈했다. 초대교회는 가진 자나, 덜 가진 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살았다. 모두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와 생활에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철저한 생활공동체였다. 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겼고, 소외된 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일하는 공동체였다. 이런 교회들이 기독교 자본주의화 되었고, 교회는 가진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기관으로 변질됐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

로마제국시대의 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돕고 받아드리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이들이 교회에서 주인 노릇을 했다. 헌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돈이 있어야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자본주의화 되면서, 과거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난당하는 이웃과 일본식민지 아래서 피압박 민족, 70-80년대 노동자들과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잊었다. 더 이상 교회는 세상을 선도할 수 없게 됐다. 오히려 세상이 자본주의화 된 교회를 걱정한다. 그리고 신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한국교회가 이들을 등지면서, 이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목회자들은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에 바쁘다. 그렇다보니 교회는 마이너스성장으로 돌아섰다. 더 이상 가난한 자와 노동자들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에서 이탈한 것이다. 성서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어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는 성령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한 하나님, 하나의 성경, 같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교권을 위해 다툴 이유가 전혀 없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이다. 예수님 당시나, 중세교회나 모두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일했다. 성령 안에서 모두가 하나였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게르만 국가들도 교회법을 모토로 시민법을 만들었다.

그것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실천적 봉사와 노력이 교회의 선교에서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세의 로마교회는 교회예산의 25%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다. 고리대금 금지법도 만들어 고리대금을 철저히 봉쇄했다. 이런 교회가 세상권력과 결탁하고, 부자교회가 되면서, 교회는 변질되기 시작했고, 이들과 등지기 시작했다. 목사들은 교인들과 동등한 관계에서 설교와 성례전을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 10월 31일은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일이다.

마틴 루터는 교권을 거부하고 만인 사제설을 주장했다. 루터는 성직자를 매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목사는 대중 집회에서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목사를 매개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중세교회의 교황이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당시로 회귀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이제 교회는 예산의 1/4이상을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코로나19로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돕는데 써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산 대부분을 나눔과 섬김을 통한 이웃사랑 실천에 사용하기보다도,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 경쟁적으로 사용해 왔고 사용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도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지면서, 교회들은 쉽게 끊을 수 있는 이웃사랑 봉사비와 해외 선교비를 중단했다. 일부 교단과 대형교회들이 코로나19로 고난당하는 이웃교회를 위해서 일부 예산을 내놓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의 삶 못지않게 지상의 삶도 중요

처음 한국교회는 앞서 지적했듯이 주로 하층민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국교회 60-80년대를 거치면서, 시골출신 노동자들이 교회로 몰려와 크게 성장했다. 또한 도시화 과정에서 농어촌교회의 농민과 어민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이 때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그런 교회가 60-80년대를 거치면서 중산층 화됐다. 이때부터 빈민계층과 노동자들은 교회에서 멀어졌고, 교회 안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예수님께서 이들이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신 교훈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던 민중교회도 자본주의화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민중교회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교회성장이 더디면서, 기성 교회화 되어버렸다. 자본주의화 되었다. 오늘 어디에서도 노동자, 빈민, 농어민과 함께하겠다는 교회를 찾아볼 수 없다. 일부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서울역을 비롯한 영등포역, 용산역, 탑골공원 등을 배회하는 노숙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칭찬 할 만 하다.

헌데 기성교회들이 부자들의 눈물은 닦아줄망정, 이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은 앞으로 한국교회를 걱정하게 만든다. 노동자와 민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화 된 교회에 대해, 아니 종교에 대해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 곳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뜻을 다 바쳐 예배를 드리는 교회여야 한다.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을 받아드리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생활의 틀을 깨고, 낡은 자아를 버려야 한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만큼, 교회의 선교정책도 변해야 한다. 한마디로 세상이 아무리 세속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만큼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아가페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공동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고, 말씀으로 깨끗해지며 성령에 의해 활력을 얻는 공동체로 변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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