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1863년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온 토마스 목사는 영국 성경공회 소속으로 윌리엄슨 목사의 집에서 한국 사람 두 명을 만났는데, 이들은 산동반도 지푸의 천주교인들이었다. 여기서 토마스 목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한국에 가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나눠주고자 하던 그는 1865년 9월에 백령도와 서해 항구도시들을 답사하였다. 다음 해, 상업적인 교역선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으로 나서서, 선장을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숨겨 들어왔다.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배가 잠시 정박하는 곳에서 약 2백 여권의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이 배가 제지를 당하고 화염공격에 전복되자, 물 밖으로 나온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면서, 살해당했다. 그가 도움을 주고자 찾아온 사람인 것을 전혀 몰랐던 자들이 가장 소중한 성경을 얻게 되었으나, 아무도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훗날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평양에서 선교하면서 이 사건을 파악하였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에 벌어진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사건의 현장에 있었거나, 가족들과 연관되었던 이들을 만났다. 바로 박춘권과 그 후손들이다. 이들은 새무얼 모펫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자 기쁘게 받아들였고, 함께 평양 장대현 교회를 세우는 주역들이 되었다. 블레어은 한국 교회의 초기 역사를 자세히 기술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탄하였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사건 이후로, 한국 조정에서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려는 모든 접촉을 금지하였다. 자칫하면 무지한 자들의 애국심으로 인해서 외국인은 무조건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인들은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기에, 외국 선교사는 그 누구도 조선 땅에 들어올 수 없었다. 1874년 흥선 대원군의 실각하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보내어서 개화를 촉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는데, 조선군의 선제 발포로 문제가 야기되었다.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후신인 개화파들은 중국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다.

4. 1884년, 갑신정변

토마스 선교사 이후로 16년 동안이나 굳게 닫혀 있던 한반도 땅에 마침내 빛이 비췄다. 안타깝게도, 피로 물들이는 정치적 변란이 빚어낸 혼돈 속에 있을 때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1884년 초부터 개화파의 중심에 있던 홍영식,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20대의 젊은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추구하던 끝에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12월 6일에는 개화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에 돌아갔고, 그날 새벽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다.

개화당의 개혁 정강 14개조에는 문벌과 신분제를 폐지와 불필요한 재정 기관을 축소, 조정 대신들의 회의제 국정운영 등이 골자를 이루고 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