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종문 목사

70년대와 80년대 초 교회를 찾았던 노동자들은 천주교회를 거쳐 불교를 찾았다가 여기서마저 외면당했다. 이들이 종교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있어야 할 종교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행복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항상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섰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크게 봤다.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가시덤불, 벼랑 끝을 헤매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면 어께에 메고 돌아와 기쁨의 잔치를 열었다.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계산을 하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또 채워진다는 계산을 한다.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계산이다. 개인의 욕심이 채워지면, 자기 가정의 행복이 이뤄지면, 세상은 어찌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뿐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행동은 어리석게만 여겨질 것이다. 비합리적인 계산은 어리석지만. 초월적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의 초월적인 사랑은 어리석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잃어버린 자를 그대로 버려두고서는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인간 이하라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며, 이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언제인가 무너진다. 결속된 유대를 포기한 공동체는 해체된다. 한사람의 아픔에 동정하지 않으면, 죽은 공동체이다. 무능한 인간, 보잘 것 없는 인간, 버림받은 인간을 어떻게 돌봐 주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성숙도를 가름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성장했다.

한사람을 버리는 공동체는 99명의 사람도 버릴 수 있다. 정신박약아. 불구자, 고통 받는 사람을 감싸줄 때 교회는 성장한다. 이들을 안아주는 이들은, 이들을 구원한다기보다도,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우리사회는 버려진 인간들을 통해 구원받고, 풍성해진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이세상의 하나님나라가 완성된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초월적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다.

이러한 사랑을 증거하고, 행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참교회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며, 닫혀진 교회이다.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자기들 안에 갇혀 이웃을 돌보지 않는 교회는 닫혀진 교회이다. 죽은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았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다. 죽음을 앞두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서 기쁨이 넘친다. 보람을 찾는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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