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출신 ‘리다 바로바’는 1975년 독일로 건너가 단연 최고의 배우가 되었으나, 오랜 와병생활 끝에 2000. 10. 27일 86세를 일기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치홍보 영화 제작에 직접 관여했던 ‘리다’는 그의 미모에 반한, 나치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유뷰남 ‘괴벨스’와 눈먼 사랑에 빠져 최고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괴벨수’ 부인과 정부인 ‘구스타프 프뢸리히’와 ‘ 등이 ’히틀러‘에게 직접 고발하였다.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938년 ’리다 바로바‘를 독일로부터 추방했다. ’리다‘는 고향인 체코 프라하로 돌아가 당시 내무장관의 조카 ‘얀 코페키’와 결혼했으나 1956년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정착했다으나 초라한 일생을 쓸쓸히 마감 했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웃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의 희생이나 헌신만을 강요한다면 그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버럭 화를 낼 것이다. 아니면 나와 무슨 상관이 없다 할 것일까?
자신만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면 된다고 할 것인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면 된다. 하면서 가슴 아픈 현실 앞에 있을지라도 정직, 진실, 정의 등은 외면한다면, 그 화가 그러한 이들에게는 외면 될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돈 없는 자, 권력이 없는 자 등의 인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노예같이 굴종의 삶을 살아도 배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신자들도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러한 무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러하다 보니 부정과 비리, 비윤리, 불법, 비성경적 등쯤은 별로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여기에 무슨 양심이 있고 무슨 선이 있고 무슨 신앙이 있다는 말인가?
오직 연자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져 죽을 일만 자행하는 것은 아닌가(마18:6 참조)? 그런데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천국에 못갈 지라도 손이나 발 또는 눈 등 지체의 일부를 제거할 사람(마8:7-9 참조)은 당연히 없으리라 보기에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겁이 난다. 그러면 반드시 “너나 잘해라”라고 조소 섞인 말로 되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魔鬼)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慾心)을 너희도 행(行)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殺人)한 자(者) 요 진리(眞理)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眞理)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셨다. 문제는 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상이 당시의 대제사장, 바리새인 등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
당시에 탐욕으로 가득한 나머지 무망(誣罔)하여 예수님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행실을 보시며 대노를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작금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기만의 영화의 탐욕(貪慾) 등은 2020년이 가기 전에 모두 버리고 조금 부족해도 생명의 복을 누리는 2021년이 되도록 경도(敬禱) 하자.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子孫)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요 8:37)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