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 성 길 목사

 불현듯,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비 올 때 쓰고 나온 우산을,/날이 개었다고 어딘가에 버려둔 것처럼,/세상살이가 쉽지 않았을 때/한껏 몸을 기울여 기대고 있던 친구를,/그사이 좀 살만하다고 해서 잊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일이 잘 풀려 내 자리가 편안할 때는 만나는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 까마득히 잊고 산다. 오랜만에 전화 통화라도 할라치면 내 주변의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쏟아내느라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잘 지내냐는 인사는 건성으로 던지고 “그냥 그렇지, 뭐”라고 힘 빠져 대답하는 친구에겐 “나도 그렇지, 뭐” 하며 대충 넘어 갔다.

몇 주가 흐리고 몇 달이 흐르고, 잠시 맑았던 하늘엔 또다시 먹구름이 드리운다. 세상살이가 언제 그처럼 쉬웠냐는 듯 다시금 혹독하게 나를 몰아세운다. 아, 다시 친구가 그리워진다.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 친구는 이러한 때 필요한 것인가를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전화를 걸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을 옷을 갈아입지 않고 가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친구는 가족보다도 가깝다. 내가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친구이다. 친구에게는 못 할 말이 없다.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털어 놓는다.

비 오는 어느날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슬리퍼를 끌고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놓고 부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은 친구가…….그립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혼이 없을수록 영혼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이들은 재산을 내세우고, 어떤 이들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랐는지, ‘지위’를 따지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친구이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내 어깨를 굳게 안아줄 수 있는 친구, 내 편이 되어 주는 친구, 함석헌 선생의 시구처럼, “위기의 순간에 구명대를 사양하면서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만한 그런 친구가 이미 곁에 있다면 다른 이들의 성공이 뭐 그리 부러울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내 얘기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 친구도 물어온다./‘다, 괜찮아?’”

쉼 없이 앞으로만 치닫던 걸음에 힘이 빠져 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듯 싶을 때, 문득 돌아보면 오랜 친구의 쓸쓸한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얄팍한 위로의 말 대신 ‘괜찮냐’는 말로 모든 위로를 대신하며, 그는 슬쩍 웃어 보인다.

“그 친구의 어깨가 아직도 굳건한지/그 친구의 이상이 아직도 건재한지 살펴보는 건/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다/나와 항상 평생을 갈 그 친구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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