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사회복지사가 다녀가고 겨우내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자 방 안 가득 고여 있던 냄새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무연고 노인에게는 상주도 문상객도 없었다 울타리 밖 소복한 여인 같은 목련이 조등을 내걸고 한 나흘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현대시학』 2021년 1-2월호에서

이재무 시인: 1983년 작품활동 시작. 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 외 11권. 소월시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이육사문학상 등 수상. 현 《천년의 시작》 출판사 대표이사.

▲ 정 재 영 장로

시의 정의 중에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미지스트들이 곧잘 사용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시는 형상화를 추구하기에 시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다. 이런 전제에서 그림의 방법론인 시각화 효과의 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화자는 숨겨진 3자처럼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냄새나 목련을 보는 주체인 나라는 1인칭 화자의 렌즈로 이 작품을 그린다면 사회복지사와 무연고 노인의 방문이 있던 집과 목련이 화폭에 전시된다.

사회복지사는 겨우내 동안 노인의 죽음을 모르고 있던 차였다. 어쩌면 무연고 노인은 사회복지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소외되고 있던 신분이다. 죽은 지 오래 된 시체 냄새가 방안 가득 고였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아무도 자주 방문을 하지도 않았고 죽음에 대한 파악을 오랫동안 안 했다는 것이다. 상주도 없고 문상객도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인간이 당하는 종말에 대한 절대고독을 그려 주고 있다.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것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일까

그러나 이 작품은 목련의 그림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다. 목련을 소복한 상주로 그린 것을 보면 망자는 아마 남성으로 추론하도록 사전 배치했음에 틀림이 없다. 목련은 상주인 동시에 조등이 되어 있다. 시란 과학적 이론을 초월한다. 여기처럼 상주와 조등의 중의성 이미지를 동원하는 모순적 모순에서 오히려 미학성이 증폭된다.

인간 존재가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곳에서 고요와 적막 속의 목련은 우주의 생명의 근원인 눈물로 그렸다. 눈물이란 마치 죽음을 슬퍼하시고 우셨던 주님과 같이 가련한 존재 자체 앞에서의 반응이기도 하다. 눈물이란 사랑의 징표다. 이 방점에서 당연히 읽는 사람은 소복을 입은 목련과 함께 울기 마련이다. 좋은 시는 이 작품처럼 침묵하는 그림 속에서 크게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그 정서에 동참하게 만들어준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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