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았다. 3.1만세운동은 일본제국주의 착취와 억압에 맞선 민족운동이며, 자주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이며, 비폭력 평화운동이라는데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 3.1만세운동이 친일인사들의 반정부시위, 강대국 권력을 숭배하는 시위현장으로 변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3.1만세운동 기념일이 일부 보수단체들이 악용하는 행사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일부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우는 국민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일본 아베에게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인사도 참여했다는데 아이러니 하다.

더 이상 3.1운동을 왜곡하지 말라

102년 전 3.1만세운동은 영미선교사들의 침묵 속에서 교회의 기층민중인 기독여성과 기독학생, 기독농민들이 중심에 있었다. 역사학계와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3.1만세운동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역사적 재평가를 여러 방향서 시도했다. 하지만 이 역시 행사의 중심에 민족대표 33인,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을 위한 행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3.1만세운동을 민중민족주의 사관에서 재평가 되지를 못했다. 한국교회가 부유해져 불우했던 민족의 과거를 보지 못한 결과이다.

그것은 3.1만세운동이 기층민중인 여성과 농민, 학생, 걸인들의 운동이다. 3.1만세운동의 현장에 자칭 민족지도자 33인은 없었다. 기층민중들에 의한 민족운동이며, 독립운동이고, 비폭력평화운동이다. 자칭 민족지도자 33인은 경찰에 자수하는 비겁함을 보여주었다는 사실. 한국교회는 자칭 민족대표 33인중 16인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자랑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3.1만세운동의 주체는 지층민중인 기독여성, 기독농민, 기독학생이었다는 것은 물론, 역사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잘못된 신학자들의 입에서는 아직도 우리민족의 순수한 독립운동이며, 비폭력 평화운동을 왜곡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연세대학교 김명구 교수는 한국복음주의총연맹이 주관하고, 현대신학연구소가 주최한 ‘한미관계와 기독교 심포지엄’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대한민국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분명 한국교회사와 독립운동사를 왜곡시키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본지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당시의 기독교지도자들의 형태와 선교사들의 형태, 만세운동의 중심에서 고난당한 교회의 기층민중, 즉 기독여성, 기독농민, 기독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조명, 굴절된 기독교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특별기획을 시도했다. 본지는 4회에 걸쳐 용기 없는 기독교지도자들의 모습, 선교사들의 친일적인 행각 속에서도 싹튼 기독교의 독립운동, 만세운동의 중심에서 ‘죽임’을 당한 기층민중, 한민족의 선천적인 애국애 등에 대해 조명, 한민족이 갈망했던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웠다.

‘정교분리’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유리

3.1만세운동은 분명 한국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이며, 항일민족운동이고,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저항한 예수님의 비폭력저항운동이었다. 한국에 기독교선교는 수명을 다한 이씨 왕조에 염증을 느낀 기층민중들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한민족에게 희망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선교는 남녀평등과 사민평등을 앞세웠다.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천대받던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몰려왔다. 이들은 압제와 수탈이 없는 새로운 세상,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나라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수명을 다한 이씨조선과 일제하에서 기독교선교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우리민족에게 희망이었다. 한마디로 기독교선교는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이었다. 특히 구약성경의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의 해방은 우리민족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초기 기독교선교는 민족주의운동을 초월하는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주제로 삼았다.

서양기독교 선교는 19세기의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세계팽창의 대세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가난하고, 천박한 피압박 민족에게 교육, 구민운동, 남녀평등, 사민평등 등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크게 기여했다. 반면 ‘정교분리’를 주창하며, 한국에 뿌리를 내린 선교사들은 알게 모르게 서양의 팽창주의와 일본의 식민지세력에 협조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19세기 서양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화를 대변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크게 성장했다.

일부에서는 민족교회에 대한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것은 식민지 세력과 정교분리를 주창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 사가 및 지식인들은 기독교의 전래가 대체로 봉건사회 극복과 근대화, 그리고 남녀평등사상의 변화, 교육의 변화에 결정적 계기를 가져다가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 평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면에 숨겨진 기독교선교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몰각했다.


“고난의 십자가 생각하며 역사의 흐름을 감지하자”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처절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자

선천적인 민족애 3.1만세운동으로 폭발

개화사상은 서양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조였다. 피압박 받는 가난한 한민족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조였다. 그러나 이것이 서양 침략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이었다는 사실과 이에 결부되어 전래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인식하지를 못했다.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선교는 민족의 자주적인 봉건체제의 극복과 근대화의 잠재력을 꺾어버린 침략세력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에 대한 비판 없이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서양의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신앙과 신학이 최고인 것처럼 포장하는데 경쟁을 벌였고, 이것이 최고의 가치인 냥 포장하기에 바빴다. 이 같은 사실은 1944년도에 출간된 헤밀턴의 저서 <개화기의 한미관계>에 잘 나타나 있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와 민족통일>에서 “이광린이 번역한 <개화기의 한미관계>는 ‘하나님, 황금, 일본인’이라고 번역되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은 조선이 알렌박사의 활동무대로서, 식민주의적 관심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다는데 주목한다. 이 책은 “개화파와 일본이라는 두 세력의 사이에서 영미선교사들의 활동이 유리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두 세력은 선교가 개화운동에 힘이 될 것이라는 점과 서양문화를 접하게 되리라는 점에서 일치했다. 서양문화와 미국에 의해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은 한국을 일본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당시 개화파나, 동학파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세력을 막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개화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그리고 영미선교사들은 일본침략세력을 등에 업고, 한민족에게 성공적으로 ‘싸구려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하나님나라만을 외치며, 고난당하는 한민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하나님나라운동이었다.

초기 기독교 선교가 침략세력의 힘을 빌려 순탄하게 진행됐다는 결론이다. 당시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서양의 세계팽창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불의를 통찰할 능력이 없었다. 힘도 없었다. 오히려 이것을 관념적, 추상적인 하나님나라와 일치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그럼에도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수난 속에서도,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서 기독교적인 민족의식이 작게나마 기독교인들 속에서 싹트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선천적인 민족애가 기독교인의 가슴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성공회 선교사였던 휴 밀러는 “결국 나라가 심란하면, 선교사업에 도움이 된다. 좋은 정부 하에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이 회의론과 불가지론 등을 수반하게 된다”(윤치호 일기 1901년 6월 25일자 중)고 했다. 이 같은 사고는 오늘 현장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쳐, 대부분이 근본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현장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우면 교인들이 늘어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휴 밀러가 말하는 학문과 과학은 바로 서양의 지배수단을 말한다. 동시에 이것은 기독교 선교의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정통 보수주의자들의 신학이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사상과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결국 선교사들이 주창한 ‘정교분리’는 기독교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하나님나라를 외치게 했다. 한마디로 교회는 예수님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 삶의 현장에서 이탈,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3.1운동 새로운 나라의 이상운동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고 모세에게 명령했다. 하나님은 파라오 밑에서 노예 생활하던 하비루들의 아우성소리를 들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 전체를 지배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이며,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바빌론 제국, 앗시리아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이집트, 페르시아, 시리아, 로마와 같은 대제국에게 짓눌려 1천년동안 신음하면서도, 새로운 나라에 대한 갈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갈망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들이 억압과 수탈에서 벗어나 굶주림과 질병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이루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또 예언자의 전통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102년 전 우리민족도 일본 식민지세력의 압제와 수탈에 항거하며, 비폭력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피 흘리며 죽어 가면서도 나라를 찾으려고 했다. 3.1만세운동도 기독교의 새로운 나라의 이상 운동이었으며, 민족 해방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는 일본식민지 아래서 일본의 잔악성을 보았다. 오늘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그 악몽을 되살아나게 한다. 일부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이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과 목회자를 향해 ‘빨갱이’, ‘좌파’, ‘좌경’으로 매도하는데 에너지를 소진한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3.1만세운동은 한국교회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오랫동안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이 되살아나기를 재촉 하는구나····”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 선언문의 문구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인용한 것이라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문구는 또 기독교인들이 3.1만세운동에 열렬히 참여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31만8천여명(천주교인 포함)에 달했다. 1919년 3월부터 다음해 3월1일까지 1년 동안 기독교인은 전국 방방곡곡서 220차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매일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로교 보고서에 의하면 1919년 3월부터 10월까지 장로교회 교역자 336명이 연행되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장로교 목사 169명, 목사후보생 102명을 감안하면, 교역자 모두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결론이다. 남신도 2.125명, 여신도 531명이 체포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조선의 기층민중이 아니다. 일본 식민제국의 식민통치였다.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이 민족에게서 차별과 수탈을 받아야 했던 이 땅의 기층민중은 맨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없었다

3.1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며, 평화운동이다. 3.1운동은 새로운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해 온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 3.1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단체는 여러 가지 행사를 가졌다. 헌데 이 행사들이 새로운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한민족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왜곡하고, 이벤트성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온다. 해마다 갖는 한국교회의 3.1절 기념행사는 자칭 민족대표 33인, 아니 기독교 대표 16인에게 맞추어져 있다는데 안타깝다.

102주년 행사도 마찬가지이다.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가 보면, 몇몇 인사들의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만세운동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모일간지는 2019년 연중기획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를 기획, 연재하면서, 첫 번째 기사로 ‘민족대표 기독인 변절논란’을 실었다. 이 기사에서 “민족대표 기독교인 16인중 14명은 독립의지를 지켰다”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왜곡시켜 온 역사를 그대로 반복했다.

한 마디로 참담하다.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은 분명 없었다. 이들은 태화관에서 자수인지, 아니면 경찰에 의해 발각되었는지는 몰라도, 자칭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어떠한 저항도 없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이날 파고다공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청년은 이들이 아니었다. 경신고등학교의 학생이었다. 학생들은 독립선언문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체도 학생들과 기층 민중이었다. 3.1만세운동이 1년 동안 전국에서 계속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서울로 유학 온 기독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학생들은 33인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을 믿지를 않았다. 학생들은 33인의 만세운동과는 별도로 만세운동을 따로 준비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3.1만세운동 일어난 한 달 뒤인 4월 1일 서울역에서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날 만세운동에는 평양과 광주, 대구 등지의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밤새 상경해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의 만세운동은 조직적이면서, 매우 치밀했다.

이들은 4월 1일 만세운동에 동참 후, 귀향해 당시 최고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교인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1년동안 만세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기독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표적인 만세운동이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아우내 장터의 거사이다. 당시 서울로 유학 온 학생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서울역 거사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움직였다.

만약 3.1만세운동의 현장에 33인이 있었다면, 3.1만세운동의 양상은 크게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다. 3.1만세운동의 주체는 33인이 아니다. 기독농민이며, 기독여성, 기독학생이다. 여기에 민족의식이 투철한 기층민중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바로 걸인이며, 기생이고, 농민, 상인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자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서, 맨손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을 폭도로 매도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은 오늘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공과를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 비판하는 일에 대해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앞으로 나가기 위한 기록이며, 역사의 흐름을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3.1절 행사 본질보다 ‘젯밥’에 관심

한국교회 31만세운동의 관심은 본질보다도, ‘젯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분명 3.1만세운동은 기독학생, 기독여성, 기독농민들이 주체가 된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독립운동이고, 저항운동이다. 한국교회는 3.1만세운동 1세기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이를 간과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역사는 지도자중심의 역사였다. 그래서 한국개신교의 역사를 민족민중사관에서 다시 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와는 유리되어 있었다. 3.1만세운동의 주체인 기층민중들을 소홀히 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사들이 자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3.1만세운동에 대해서 별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미국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가 자신의 저서 <극동의 지배>에서 말하고 있듯이, 대부분의 초기 한국선교사들은 한민족을 돼지같이 더럽고, 개같이 사납고, 미개한 민족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선진문화를 한국백성이 배워야 한다고 식민사관에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3.1만세운동은 순수한 한민족의 비폭력평화운동이며, 독립운동이고, 항일민족운동이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민족은 맨주먹으로 일본경찰과 헌병의 총칼에 맞섰다. 일본식민지세력의 협력자였던 일부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 땅의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일본에 불만을 가진 일부 과격분자들의 폭동이다”고 매도했다. 오늘날 일부 기독교인과 목사들의 생각도 선교사들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다 일부 한국의 사가들은 3.1만세운동이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독립운동으로 왜곡 평가해 왔고 평가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한국교회는 해방이후 오늘까지 해마다 3.1만세운동을 기념하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특히 기독교인 16인을 기념하는 행사로 만들어 버렸다. 만세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기독농민, 기독여성, 기독학생, 그리고 보잘 것 없는 기층민중들을 잊고, 역사를 왜곡시키는 일에 앞장서 왔다. 그래서 의식 있는 국민은 3.1만세운동 1세기를 기념해서 왜곡된 기독교 항일민족운동의 역사가 바로 잡혀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의 3.1운동 기념행사는 이벤트성에 불과하다는데 안타깝다. 이 기념사업 역시도, 하나가 되지를 못하고, 각 단체별로 기념행사를 가졌다. 분열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전통에 매몰되어 있는 결과이다. 역사를 왜곡한 나라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으로 진일보 할 수 없다. 민족대표 기독교인 16인을 포함한 33인은 스스로 민족대표라고 불렀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기층민중들은 33인을 민족대표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인정하지 않는다.

독립선언문에 이름이 올린 33인, 그 중에 기독교인 16인의 가치가 큰 것이 아니라, 3.1만세운동의 주체였던 기독학생, 기독농민, 기독여성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한국교회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는 선교 130년의 왜곡된 역사도, 민족민중사관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예언자 전통을 잇는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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