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해묵은 감이 있는 책들이 쌓여 있는 위치에서 노랗게 변색 되어있는 책(세계를 움직이는 100인”이란 1987년 1월호 신동아 별책부록)을 한 권 꺼내보았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과거를 통하여 작금의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칼 발트(Karl Barth)’에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등 현대 신학자들은 “신학의 사명은 변하지 않는 복음이 각각 새로운 현실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흑인들이 노예화 되어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몰트만’이 누구인가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의 대부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추구했던 희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 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 본다.

‘제임스 콘(James H. Cone 1938~)’은 백인신학자들이 인종차별주의와 복음이 날카롭게 대치된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백인들의 억압 아래 있는 흑인들에게,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힘을 적용시켜 주는 것이 절박한 요청이 라고 생각함으로 흑인 신학은 곧 혁명의 신학을 낳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백인들의 매일 매일의 억압과 폭력과 거짓말로부터 어떻게 힘없는 흑인들을 해방시켜주는가 하는 과제는, 성경이 백색(백인의 사고와 이익)으로 도색 되어 진 데서부터 성경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백인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에 의해서 독점되고 도색 된 복음이 그들의 지배 논리로 악용당하고 있는 사태로부터 복음 자체가 원래 역할대로 구원과 해방의 힘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세계인이 주목했던 ‘마린루터 킹’ 목사가 암살을 당하였다. 과연 그는 누구의 뜻에 따라 누구를 위해 죽음의 길을 갔단 말인가? 그런데 그가 총탄에 쓰러지던 시절, 그 몸서리쳐지는 인종차별 속에서 학위를 받고도 교단에 서지 못했던 ‘제임스 콘’은 ‘흑인해방신학자’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구스타프 구티에레즈’와 쌍벽을 이루었던 ‘환 루이 세군도(Jun L. Segundo. 예수회 신부)’는 하비 콕스, 칼 막스, 막스 웨버, 제임스 콘, 이 네 사람을 비교한 후 해석학적으로 완결된 사상은 ‘콘’밖에 없다고 극구 찬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현실주의 계보에 서 있는 ‘베넷’ 등의 많은 백인 신학자들은 ‘콘’의 신학을 비판하였고, 물론 한국의 신학자들도 ‘콘’을 비판하는 흐름에 있었다. 그러나 ‘마틴루터 킹’ 목사의 생일(1960년 1월 21일)이 ‘미국 연방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오바마’라는 미국의 흑인 대통령이 나오고, 재선을 하는 등 변화된 현실이 목격 되었으며, ‘트럼프’에 이어 ‘ 조 바이든’ 등 미국 역시 변화에도 코로나(COVID)-19로 불확실성 속에서도 세계는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분열의 외침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웃의 사랑을 받고, 인정받는 진정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나만의 구원이 아닌, 애국 애족을 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까? 하며 코람 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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