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6. 알렌, 한국 땅에 들어오다

1884년 9월 20일, 제물포 항에 알렌 선교사 (Horace N. Allen, 1858-1932)가 도착하였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날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훗날 한국에 들어오는 모든 후배 선교사들은 1884년을 한국 개신교 선교의 최초 기준점으로 삼았다. 알렌은 정식 선교사로서는 허락을 받고 들어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 공사관의 담당 의사로서 입국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있던 당시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직접적인 선교가 불가능하였기에, 간접적인 선교방법을 채택하여 사역을 시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조선 땅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기도와 간청을 들으시고, 마침내 그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알렌이 의료 선교사로서 한반도에 들어오기까지 그 개인과 가정과 교회는 물론이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선교사들 등 여러 곳에서 수많은 준비와 헌신이 있었다. 특히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추진되어온 일련의 중국선교에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던 중에 한국으로 방향을 바꿨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알렌의 사역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 역사학계에서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알렌이 한국에 세운 최초 서양 의료기관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박형우 교수가 “알렌의 의료 선교사 지원과 내한배경”에서 알려지지 않은 미국에서의 준비과정과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는 배경들을 소상히 밝혀냈다.

첫째, 알렌은 의료 선교사로 필요한 모든 준비과정을 훌륭하게 이수했고, 기도와 열성을 가지고 선교를 열망했던 청년이었다. 그는 대학과 의과대학원을 수학하는 6년 동안, 변함없이 기도하면서 해외 선교를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반도의 형편을 기억하시고, 멀리 미국 청년의 마음에 꿈을 넣어주시고 선교사의 소명으로 채워 넣으셨다. 한반도에의 소명을 받은 청년들은 이후로 수없이 늘어났다.

알렌이 집 근처에 있는 델라웨어 (제일) 장로교회 (씬시내티시, 오하이오주)에 다녔는데, 1810년에 죠셉 휴즈 (Joseph S. Hughs)가 개척 목사로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2백여 년 동안 세계 선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장로교회이다. 이 교회는 최근에 알렌이 서울에 개척한 남대문 교회와 교류를 가진 바 있다.

부모님이 5남매의 막내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선교사로 헌신케 했는가는 자세히 소개된 바는 없다. 좀 더 밝혀져야 할 부분들이 있지만, 박형우 교수가 조사한 알렌의 선교사 준비과정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알렌이 선교사로서 철저하게 준비되고 기도와 헌신으로 다져진 사람이었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데, 그의 모교회인 델라웨어 장로교회가 임시목사 머티어 목사 (Calvin W. Mateer, 1836-1908)를 이미 1863년에 중국 산둥(山東) 주재 선교사로 파송했었다는 사실이다. 머티어는 산둥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성경을 베이징어로 번역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바로 이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1882~3년 사이에 알렌은 중국 산둥 선교부로 가려고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신청한 것이다. 산둥 선교부에는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네비우스(John L. Nevius, 1829-93)가 널리 알려진 지도자로 많은 열매를 맺으며 활약하고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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