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도 벌써 7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이 없어서일까? 그 유가족들은 그제나 오늘이나 눈가가 부풀어 올라 잦아들질 않고 있다. 그뿐인가 용산 참사 등 여러 참사 때도 사악(邪惡)함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었음에도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보도 태도를 보이는 일부 언론 등이 존재한다는데 참담함을 느낀다.

왜일까? 성경의 ‘에서’와 ‘야곱’의 기록에서 찾아보자.

(19)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中)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 25:19-34)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기독교)은 어떠한가?

돈, 주택 등 경제적 이익에 있어서는 진실, 정의 양심 따위에는 관심 없으면서도 팟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아넘긴 ‘에서’를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영끌” 곧 영혼까지도 팔아 집을 사야 한다는 말까지 회자 되는 것은 진실, 정의, 나아가 믿음, 신앙 양심까지 팔아서라도 집 등이 우선이라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나는 성도(聖徒)다”라고 외치며 투기에 편승하거나 동조하면서 비난, 단죄, 경멸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물어뜯는 것에 찬사를 보내는 외식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서일까? ‘사도 바울’은 “ ~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고 한 것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성도(聖徒)라면 성경 말씀을 가감하거나, 왜곡하거나, 우롱하거나, 짓밟는 것과 같은 탐욕적이거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사악함을 범치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순교(殉敎), 순국(殉國), 애국(愛國) 등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음행(淫行)하는 자(者)와 혹(或) 한 그릇 식물(食物)을 위(爲)하여 장자(長子)의 명분(明分)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妄靈)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祝福)을 기업(基業)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求)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悔改)할 기회(機會)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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