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 내 동생 아벨은 어디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슴 아픈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고, 돌을 갓 넘긴 아이가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또한 자녀에 의해 부모가 살해되고, 버려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변명은 일관되게 한목소리를 낸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이러한 일들이 기독교인 부모에 의해서, 기독교인 자녀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가정의 중요성을 상실했다. 정인이 살해사건은 이를 반증해 주고도 남는다. 정인이를 살해한 양부모는 모두 목사의 자녀이며, 양부는 기독교단체에 근무했다. 입양기관 역시 양부모의 가정이 기독교인 가정이고, 특히 양부모가 목회자의 자녀라는 점을 고려해, 입양을 결정했을 것이다. 정인이 살해사건의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인 지난 9일 돌을 갓 넘긴 아이가 또 양부의 학대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주인인 아이들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학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과 교회교육의 중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성경은 건강한 가정과 공동체, 민족을 위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광야 40년의 생활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율법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율법은 사악한 인간들을 강제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졌다.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집트의 파라오 밑에서 고난을 당한 떠돌이 히브리민족에게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한 부모와 여성, 아이들의 아픔이 인간사회에서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라는데 그 의미는 매우 크다.

고아는 집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이웃을 사랑할 줄을 몰라서 불쌍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 모두가 평등한 새 나라를 위한 교육의 연대성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물질의 풍요 속에서 많은 아이들이 평등한 새 나라를 위한 교육의 연대성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개인 중심의 교육에 치우친 나머지 교육도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기회주의 교육과 출세주의 교육에 머물러 가족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며,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교육에서 빗나갔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를 하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이다.

그렇다보니 이웃의 아픔, 부모의 아픔을 몰각한 채, 모두가 내 안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제 자녀를 살해하고도 당연하게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훈육차원에서 매를 들었다” 등으로 변명하기에 바쁘다. 또한 “부모의 재산 조금 일찍 받아썼는데 무슨 상관이냐”이며, 부모학대를 정당화 한다. 성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하나님은 가인(우리)에게 “네 동생(이웃)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분명하게 묻고 계시다. 다시 말해서 양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정인이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살해당하는 아이, 버려지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도, 가슴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인간 모두가 돌로 만든 떡과 오염된 물을 마셔, 마음이 돌과 같이 굳어져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드리지 못한다. 나의 마음서 너의 마음으로 생명수가 흐르지 않는다. 이제 인간에게서 ‘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가정교육, 주체성과 연대성에 중점을 둔 교육 및 훈련과정 절실
돌로 만든 떡 먹고 굳어진 사회, 하나님나라의 주체 아이들…


천국은 아이들의 것, 내 부모를 공경하라

모두가 맘몬에 길들여져 내 마음에서 너의 마음으로 흐르는 생명수를 기대 할 수 없다. 학대받는 아이, 버려지는 부모가 그 동안은 없다가 갑자기 늘어날 리 없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성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천국은 아이들의 것이며, 내 부모를 공경하라고 율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율법은 인간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강제하기 위해 주어졌다. 법을 지키지 않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이다.

아이들은 하나님나라, 새로운 나라의 주체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주체적 교육과 평등한 새 나라를 위한 교육의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교육방법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파라오의 억압과 노예에서 해방되고서도, 며칠이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를 못했다. 들어가는데 40년이 걸렸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의 훈련과 교육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체성과 연대성을 갖게 하는 훈련이 필요했다. 파라오 압제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주체적인 용기가 없었다. 가로 막힌 산을 무너트릴 기백도 없었다. 적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들을 과소평가하는 노예근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단합해서 위험을 무릎 쓰고 공동의 목표, 자유롭고 평등한 새 나라를 이루자는 생각보다는 제 한 목숨, 제 아내와 자식을 아끼려는 마음이 앞섰다. 용기 있는 연대의식보다 개인의 생존과 가족에 더 집착하는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공동체를 이루려는 의지가 없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향해 준엄한 선언을 했다.

“너희들은 죽어 시체가 되어 이 광야에 쓰러지고 말리라 그리고 너희의 자식들은 너희의 ‘배신 죄’를 짊어지고 너희의 시체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한다”

히브리인들의 노예근성은 한마디로 패배자로서, 좌절자로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에 곧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과 함께 광야에서 다툼과 갈등을 계속해서 벌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평불만을 드러내며, 이집트 파라오 밑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어떤 때는 그들을 다독거리고, 어떤 때는 토라지면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이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한 것은, 자신을 믿고 따랐던 히브리민족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은 한민족의 고난이다.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일제 36년의 식민지 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은 고통과 좌절을 겪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쉽게 동화되고, 일본의 국가주의에 굴복했다. 청년들은 일본군에 입대해 독립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성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하수구만도 못한 고난을 당했다.

평등의 공동체 교육 절실한 시대

그리고 조선의 일부 지식인과 종교지도자들은 조선의 청년과 소녀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데 앞장섰다. 오늘 한국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기독교는 끝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범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공동체 실현을 위해 교육하고, 훈련해야 할 교회는,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켰다. 그리고 돈! 돈! 돈! 악마의 금전을 외친다.

오늘 한국교회는 헌금을 많이 내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며, 하나님의 영(성령)을 오도하고, 가식적인 기도를 하는 교인들이 마치 참 그리스도인양 오도한다. 이렇게 교육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공동체를 상실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가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기독교인들처럼 개인 이기주의적이며,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돼 자신과 자신의 종교만이 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 중심의 이웃과 더불어 사는 평등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에서 멀어졌다.

선교 초기 조선의 백성에게 마지막 희망으로 떠올랐던 한국교회는 오늘날 자신의 등에는 짐을 지지 않고, 교회건물 위에 무거운 십자가 탑을 높이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교육하는 대신,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이름을 팔아 맘몬과 바벨의 상징인 헌금만을 강요하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척도, 믿음의 척도로 교육한 결과이다.

그리고 영적이란 이름으로 교인들을 성폭행 및 성추행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추악하다. 가부장적 제도에 길들여진 교회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성추행을 덮기에 급급했다. ‘용서’와 ‘은혜’라는 신앙적 가치를 내세워, 피해자에게 ‘덮어 줄 것’을 사적으로 강요하는 잘못은 관행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교인과의 불륜을 통해 자식을 낳고도, “성령의 세례를 준 죄 밖에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는 교인 가정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며, 오산이다. 교회 교육의 핵심이 헌금에 맞추어지면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교인들의 가정은 신앙의 가정이라고 말하기 힘들게 됐다. 오늘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범죄현장의 중심에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교회 교육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광야생활 40년의 훈련과 교육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교회는 사기꾼들의 비자금을 세탁하는 장소, 아니 목사의 비자금을 형성하는 잘못된 신앙공동체로 타락했다는 지적의 목소리도 나온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의 교육은 한마디로 실종됐다. 목회자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은 제쳐 두고라도, 절도를 비롯한 목회자의 보이스피싱 연루, 국가를 상대로 사기, 전철 안에서의 여성을 상대로 한 ‘몰카’ 범죄 및 성추행, 목회자가 가난한 목회자와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 등등의 범죄가 끊이지를 않고 있다.

심지어 존속살인도 교인들의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참담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타락한 목회자 및 교인들의 범죄가 각종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국기독교가 더 이상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종교집단이 됐다는데 국민들은 실망한다. 한국교회는 국민들의 눈높이를 따라잡지를 못하고 있는 것도, 교회의 교육과 훈련과정이 맘몬과 바벨에 치우친 결과이다. 교인들에게 맘몬과 바벨이 곧 축복이라고 교육하는 한, 한마디로 교회는 희망 없다.

광야 40년의 교육과 훈련과정 회복하라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지도자였다. 구약성서는 모세를 가장 성숙한 존재로 기록했다. 모세는 에집트의 노예생활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고, 다독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다가 지친 하나님이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토라지면, 애걸복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루 15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했다. 잠자리도 편치 않았다. 지배자들의 학대를 받으며 살자니 노여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정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면, 그들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이라면,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씨름하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에집트의 종살이를 기억하고, 더 이상 이러한 일이 없어야 한다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10계명을 율법으로 주셨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이웃과 더불어 정의와 사랑, 평등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된 나라의 참된 주인으로 교육시켰다. 이것은 분명 피압박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과 훈련과정이다. 역사의 현실이 냉엄하듯이 하나님의 교육과 훈련도 냉엄했다. 광야에서의 교육과 훈련은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창조의 현장이었다.

광야, 아니 빈들은 텅 비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음란과 물질주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세아는 광야로 나가자고 호소했다. 한마디로 광야로 나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다. 세례요한도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시대를 열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악마들과 씨름한 이후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욕심을 부릴 것도,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허영심이 허망하다는 것을 광야에서 깨달은 것이다. 또 광야는 지배자들이 지배욕과 탐욕을 버리고,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박재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1988년, 도서출판 천지)에서 “광야는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부패한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곳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변혁의 힘이 생기는 곳이다. 오늘날 광야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광야를 열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속된 나라의 참된 교육

그렇다. 성서적 교육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다. 박재순 교수가 물량주의와 맘몬주의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기독교인들을 향해 광야로 돌아가 교육과 훈련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 평등공동체를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민족과 가정에 세울 수 있다.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에 화해하는 방법,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노예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교육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는 교육과 훈련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어떤 강도 건널 수 있다. 어떤 산도 넘을 수 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국민 모두가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19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 그렇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코로나19로부터 해방돼 새로 시작하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연대교육만이 가능하다. 쓰러지더라도 죽지 않았으면 일어나야 한다.

또 여러 번 넘어지더라도 시체가 아니라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맺은 십계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육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고, 이웃과 더불어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등의 공동체를 실현하라는 계약이다. 제1계명부터 사계명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는 계명이며, 5계명부터 10계명은 이웃과 더불어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등의 공동체를 실현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시고, 에집트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 중심의 교육과 훈련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했다. 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타내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고통을 기억하라는 교육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리스도인 모두는 이를 지키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평등의 공동체를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했으면, 인간과 하나님 간에 계약을 맺어 이를 지키게 했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한 피조물을 사랑하셨다. 자신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토라지면서도, 징계를 하시면서도, 가다가 멈추고 돌아서면 용서했다.. 그리고 다독거리며 다시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지 말라고 다독거렸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정의로운 가정, 평화와 평등의 공동체를 이 땅에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때문에 살아 있는 자들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광야 40년의 교육과 훈련과정을 재현해야 한다. 한마디로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새 나라를 향한 광야의 행진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만이 예수님께서 역사의 현장에서 당하신 고난의 길에 참여하는 것이다.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민족 아니 세계민족이 사는 방법이다. 그리고 해체되는 가정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죽임당하는 아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버려지는 부모들이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에 참여 할 수 있다. 그리고 범죄의 소굴이 되어버린 교회가 생명력을 다시 찾을 수 있다. 모두가 속박의 굴레에서 해방돼,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평등의 신앙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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