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창 주 교수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데리고 70장로와 함께 야웨를 예배하고 산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한다. 이튿날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제단과 열두 기둥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이윽고 언약의 책을 이스라엘 앞에 낭독하니 모든 백성들이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한다. ‘언약의 책,’ 또는 ‘계약법’은 머리글의 표에서 보듯 20장 22절부터 23장 33절까지다. 크게 보면 미슈파팀과 드바림 등 두 갈래로 구분된다. 이를테면 21-22장 후반은 주로 법정의 판결문처럼 보이고, 22-23장은 대부분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다. 따라서 후자는 필연법(apodictic law)이고, 전자는 판례법(casuistic law)으로 불린다.

판례법은 더러 결의론적 법이나 사례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구약의 미슈파트 번역은 율례, 법도, 규례, 법령, 판결, 정의, 심판 등등 다양하기 이를 데가 없다. 우선 미슈파팀에는 제사법(출 20:22-26), 노예법(21:2-11), 사형법(21:12-22:17), 상해법(21:18-22:17)으로 요약된다. 공동체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례들을 유형별로 나누고 법제화한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라. “어떤 사람의 소가 그 이웃의 소를 받아서 죽게 하였을 경우에는, 살아 있는 소는 팔아서 그 돈을 나누어 가지고, 죽은 소는 고기를 나누어 가진다”(출 21:35). 이와 같은 법의 확립은 이웃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면서 공동체 유지를 위한 비용을 최소화하게 한다. 이 때 공명정대한(impartial) 판결이야말로 미슈파팀의 출발이며 판례법의 핵심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규정한다(신 1:17).

한편 필연법은 절대법, 정언법, 당연법, 정명법, 규정법, 단언법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편의상 ‘필연법’으로 칭하지만 본문은 ‘야웨의 말씀들’이다.

사형법(출 22:18-20), 약자보호법(22:21-23:9), 휴경과 절기법(23:10-17), 기타(23:18-33) 등이다. 사실 필연법의 형식은 이미 십계명에서 소개된 바 있다. 언약의 책에 다시 정언 명령으로 선포한 것은 더욱 복잡다단해진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재확인하는 셈이다. ‘너희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며 억압하지 말라 너희도 이집트에서 나그네였느니라’(출 22:21).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라’(출 23:6). 앞의 인용은 그 원인을 밝혔으나 사실 필연법은 합리적인 근거나 구체적인 예증이 필요 없는 정언(定言) 명령이며 그럼으로써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칸트는 정언 명령의 본질을 명확하게 설파한다. 즉 필연법이란 어떤 동기나 목적에 의존하지 않고 보편적인 원칙을 제시하는 논리적 진술이다. 따라서 그 실천의 근거는 도덕성이 아니라 합리성에 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객관적이며 필연적인 명령이다. 이와 같은 필연법 앞에 이스라엘이 서 있는 이유는 그들이 계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름지기 하나님의 절대 명령을 따라야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세는 바로의 압제로부터 탈출한 동기와 계약법의 원칙에 따라 금지할 것과 명령할 것을 선언할 뿐이다. 판례법에서 살펴본 대로 위반 시 처벌 규정이 뒤따르지 않는다. 만약 필연법을 거스른다면 신성을 거부한 것이며 공동체의 분란을 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모두에게 해악이다. 필연법은 야웨 하나님의 본성에 충실하며 그 신앙공동체의 건강한 유지를 위한 명령이다.

언약의 책에 들어있는 두 가지 미슈파팀과 드바림은 씨줄과 날줄처럼 결합되어 출애굽기의 중심부를 이룬다. 그 둘의 문학적 장르와 성격을 뚜렷이 구분하기 위해 상황적 명령과 절대적 명령으로 나누기도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행정과 조직에 대하여 이드로의 조언을 들었다면(출 18:25), 사법과 판결에 대하여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출 21:22-25). 따라서 둘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나 출애굽 공동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평등한 사회와 제의 공동체라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모세는 언약의 책에 기록한 내용을 확고히 하고자 선명한 제의적 행위를 통하여 매듭짓는다. 그는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미슈파팀과 드바림은 야웨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피라고 선포한다.

한신대 구약학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