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환경위기가 곧 나의 위기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핵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기로 결정했다. 이 때에 지구온도 상승 1.5도로 억제하기 위한 P4G 서울정상회의가 열렸다. 세계정상은 해양오염 방지를 위한 국제적 노력 등의 내용이 담긴 서울선언문도 채택했다. 지난 30일과 31일 양일간 열린 P4G에 참석한 주요국 정상급‧고위급 47명, 국제기구 수장 21명, 총 68명이 해양환경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생명의 물’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되돌릴 수 없게 되어 버린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복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피조물 모두를 창조주 그의 나라 미래로 인도하는 하나님을 새롭게 조명, 핵 쓰레기 등의 재난으로부터의 안전, 세균으로부터의 안전, 세계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아니 너무 늦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는 인간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 안에 있는 피조물, 피조물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복원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기 위해, 후손들이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질서 복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거하며, 자연과 화해하고, 사귐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진보’, ‘문면의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와 자연재해, 메뚜기떼 출몰, 빠른 사막화,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이 세계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죽음의 길 위에 서 있다. 동식물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언제 지구가 멸망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또한 자연의 위기는 곧 환경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의 위기이고, 지구의 위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자연의 위기, 곧 환경의 위기는 포괄적이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는 묵시 사상적 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지구상 모든 피조물들의 ‘삶의 위기’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위기가 아니다. 이는 지구상의 피조물 모두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가 됐다.

그럼에도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자연재해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 지구가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앞을 다투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도 핵 쓰레기를 세계민족이 공유하는 바다에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맑은 물에서 생산되는 수산자원, 먹거리를 마음 놓고 먹을 수 없게 됐다. 물의 오염은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산업의 발달은 착취와 다시는 회복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과거 신학적 적대자는 “피와 땅”, “종족과 민족”이라는 종교적 -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면, 오늘날 신학적 적대자는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실현되고 있는 허무주의이다(몰트만). 이는 힘에 대한 비자연적인 의지와 지구상에 있어서 지배권에 대한 비인간적인 투쟁에 의해서 야기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사귐의 대상이 아닌, 힘에 의한 정복‧지배의 대상으로 여겨왔고, 여기고 있다.

비자연성 속에는 현대세계의 무신성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결과 초래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 성령 안에서 재발결하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 절실

자연과 인간의 화해가 절실한 시대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잃어버린 비인간적이었다. 이스라엘서 로마를 거쳐 유럽에 정착한 기독교는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일에 경쟁을 벌였다. 당시 기독교는 자연을 사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복하고 지배하려고만 대들었다. 오늘 인류가 기후변화와 온난화, 신종바이러스감염증, 지구의 사막화 등과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킨 것은 자연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려고 한데서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 할 수도 없고, 이유를 달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질서 균열과 환경문제에 대해서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 모두가 책임감을 갖지 않는다는데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부 기독교 단체와 교단이 인간들의 탐욕과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회복을 위한 환경주일을 제정했다. 이에 따른 세미나 등도 개최하고 있다.

지구온도 상승 1.5도로 억제하기 위한 P4G 서울정상회의도 열렸다. 문제는 이 같은 일들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개신교는 말만 무성하고 행동하지 않는 종교로 인식되어 왔다.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유럽에 정착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파괴에 그 어느 종교단체보다도 책임감을 통감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것은 자연을 사귐과 공존의 대상이 아닌, 지배하고 복종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은 비자연성 속에서, 인간은 무신성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과거 교회에 대한 신앙의 확실성을 제공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힘이었다. 창조 속에서 현존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었다. 여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유익했던 ‘그리스도론적 집중’에 상응하여 신학의 지평을 하나님의 창조 전체를 향하여 우주적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그래야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환경의 위기, 생명의 위기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 죽음의 삶에서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영위 할 수 있다.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성령 안에서 재발결하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물론,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의 회복을 위해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신다. 그의 영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배신했다.

그리고 자연을 공생공존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 자연을 지배하려고만 대들었고, 대들고 있다. 성서의 창조론을 무시하고, 하나님과 자연의 갈등을 조장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탐욕의 잔꾀에 빠져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도전한 결과, 인간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했다. 그래서 현대 자연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에 화해하고, 포괄적인 공생의 길을 찾으라고 촉구한다.


창조로서 자연을 인식하는 것 중요

인간의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에 도전하고, 지배한 결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에서 멀어졌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또한 생태학적 창조론을 부재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자연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통해서만, 현존하는 하나님 안에 거 할 수 있다는 성서의 진리를 잊었다.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핵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는 상태에서 현존하는 하나님 안에 거 할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관계는 한마디로 평화, 화해,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공생의 길을 찾을 때만이 가능하다. 자연을 지배하고, 탐욕의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 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현존하는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자연과학자, 장조신학자들의 주장이다.

지구는 미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곳이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고 있는 “땅을 지배하라”는 논리를 내세운 산업의 발달과 하나님의 창조질서 파괴는 하나님의 창조론에 도전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가로 막았다. 이는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게 하고, 다툼과 갈등, 그리고 분열을 만연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한 하나님의 참사랑을 기대 할 수 없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과 모든 피조물은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자연과 인간의 평화, 화해, 공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성서 속에서 찾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 안에 계신이 하나님을 재발견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아름답게 가꾸는데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은 지구의 창조자이며, 주인이고,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는 ‘지배의 관계’로 이해하고 인식 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의 사귐의 관계로 이해하고,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로서 자연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보전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교통하며, 통합하는 사고를 배워야 한다. 여기에는 평화와 화해, 공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피조물 모두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아름다운 삶,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오늘날 가진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이들에 의해서 환경의 위기가 닥치고 있는 것은 인류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다가 준다. 이미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근대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모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동성애 등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이탈했다”고 비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이 위기에 처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미온적이다.

원자물리학과 생물학의 발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균열을 가속화 시켰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로막았다. 오늘날 지배원칙은 로마의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는 법칙이 현대 자연 지배를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를 대변하는 유럽과 아메리카는 산업의 발전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마구 파 헤쳤다. 이로 인해 오늘 세계는 자연재해, 환경위기, 인간의 위기에 직면했다. 아니 피조물 모두가 위기에 직면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피조세계 인간이 정복 할 대상 아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며, 성령을 몰각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죽음을 암시한다. 이제라도 현실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생동하는 것은 생동하는 것 그대로 이해하고,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의 근원적이고, 특유한 사귐과 그의 관계와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인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현실적인 것과 생동적인 것은 그것의 관계와 상황, 환경이 집약해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통합적이면서, 전체적인 사고는 사회적인 방향과 함께 단면적이고 결국 전면적인 종합의 목적을 지향해 나간다. 자연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은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그 길을 찾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해야 할 일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고 생동적인 것의 상호관계 속에 등장하기 위하여 자연을 인식하고,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는 삶을 장려하기 위한 필요한 자연과 인간의 사귐에 큰 도움이 된다. 여기에서 자연은 인간의 주변 세계를 뜻한다. 상호관계의 그물이 형성됨으로써 인간과 자연은 화해하고, 공동의 삶이 이루어진다. 정치적, 법적인 영역에서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자연의 권리를 보존하고, 균형을 맞추는 ‘자연과의 계약’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자연은 소비 등을 통해 사람(소비자)들의 효용을 증가시킬 수 있는 ‘주인 없는 재화’로 간주 할 수 없다. 이것은 종교적 영역에서 그것은 창조적 사귐으로 이해해야 한다. 피조계는 더 이상 인간이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함께 공생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는 인간과 자연의 계약, 이 전체, 이 사귐 속으로 인도해 들이며, 망각을 벗어나서 다시 의식하게 하고, 심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님의 질서 파괴를 벗어나 다시 회복하고, 복원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유도된다. 이를 통해 세계를, 인간을 창조의 사귐 속으로 끌어 들인다. 이것을 포괄적인 생태학적 창조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1차원적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창조의 사귐에서 벗어난 산업의 발달, 특히 물리학과 원자력의 발전은 자연을 지배하고, 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인간의 자연지배는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 대홍수라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특히 원자력의 발전, 원자력의 자연지배는 한 번에 수십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일본정부의 핵 쓰레기 바다에 버리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해서, 주변 국가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화해와 사귐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 할 수 없다. 더 큰 재앙이 우리에게 몰아닥칠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와 사귐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 자연과의 화해를 거부한 결과, 재앙을 경험했고,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버려라

세계 민족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살고 있다. 코로나19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진정기미가 보이면, 여지없이 변종된 바이러스가 나타나 세계민족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세계민족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 정국에서 지난 1년 동안 살았다. 일부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자연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가득 차면서, 코로나19라는 재망을 자초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이 창조한 지구, 모든 피조물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혁명을 일으켰다는 말도 나온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은 계속해서 요술을 부리고 있다. 변이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속출하고 있다. 개발된 백신도 효능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생명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이 성령 안에서 새롭게 인식되고, 화해하는 것은 피조물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길이다.

인간은 자유를 향한 혁명을 인류역사 시작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벌여왔고 벌이고 있다. 하지만 생명을 위한 혁명, 자연을 위한 혁명을 한 번도 벌이지 못했다. 오늘날 세계는, 지구는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고래의 뱃속에서, 거북이의 뱃속에서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등의 여러 가지 쓰레기들이 여지없이 나온다. 심지어 많은 바다생물과 인간들이 죽음을 당하고, 아사직전에 있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바다에 핵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겠다고 결정한 것에 대해 세계민족이 주목하며, 투쟁에 나선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분명 일본정부의 자연과, 사귐과 화해를 거부하는 결과이다. 일본은 분명 자국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과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해 희생된 피조물들을 망각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지키기 위하여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에 거하기 위해,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인간은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된 자연을 복원시키는 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거하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