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종 문 목사

 6월은 보훈의 달이다. 어느 시인은 6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6월25일이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6.25 한국전쟁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수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해, 일부는 해외로 입양됐고, 일부는 고아원과 같은 시설에서 보내야만 했다. 1천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국가는 6.25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국군장병과 일제 치하에서 희생된 애국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6월 6을 현충일,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한국교회 역시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지키며, 이 땅에서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해 일한다. 6월 ‘잔인한 달’ 한국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당한 순국자들을 위해서, 분열과 갈등, 이념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필자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합을 위해서 기도해 왔고, 이를 위해 여러모양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헌데 오늘 대한민국과 세계를 보면, 예수님의 ‘샬롬(평화)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팍스(로마평화)만 노래한다. 과거에는 전쟁만 없으면, 총을 쏘지 않으면, 그래서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이것을 평화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목격해 왔다. 양성화된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음성적인 전쟁이 더 치열하다. 이것을 냉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 중국은 전쟁준비를 위한 무기개발에 경쟁을 벌였고, 벌이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핵무기는 인류를 20번 전멸시키고도 남는다고 한다.

과거의 평화는 안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네 것, 내 것의 한계를 알고 서로 협상하며 살면 될 것 아니냐.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적당히 싸움하지 말고 사는 것을 평화로 알았다. 이런 사고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성서의 평화는 기존질서의 안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평화운동은 매우 능동적인 것이다. 사랑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나를 개방해서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여는 것이다.

이것은 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한 것과 똑같다”고 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한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양성화된 것이나, 음성적인 전쟁 모두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을 우리에게 교육하고 있다.

6월 잔인한 달,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참 평화를 실현해야 할 책임감이 있다. 북한의 인민 모두는 김정은 한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열국들은 분단의 당사자인 남북한을 제외시키고 평화을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자존심이 상한다.

예수님은 진일보한 평화의 의미를 내놓았다. 예수님은 “원수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다. 참평화운동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평화를 방해하는 근원적인 것을 공격해야 한다. 예수님의 참사랑과 평화는 기독교를 교리화 시킴으로서 본질이 흐려졌다. 예수님은 교리를 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은 보훈의 달, 잔인한 달, 6월, 우리에게 주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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