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세계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창조세계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오늘도 당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창조를 지으시고, 화해하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구원 받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는 상위질서와 하위질서, 주인과 종, 명령과 복종이 없다. 모두 사귐을 통해 평등한 가운데 함께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주의 영이다.

바울은 “신적인 영은 허무의 세력, 악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창조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창조세계 안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관리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인간은 고독 할 이유가 없다. 모두가 행복해야 하고, 평화적인 창조를 위해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피조물 모두가 서로 안에서. 서로로부터 서로를 위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태학적 창조론이며,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모든 것은 내부에 있어서 상통한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자연과 자연은 서로 일치해야 하고, 개방되어야 한다. 서로 얽혀 주고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체계들과 여러 층으로 구성된 공생의 양식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자연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인간사회는 태양과 땅, 공기와 물,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순환운동 안에서 또 순환운동 안에서 숨을 쉬고 산다. 때문에 인간은 우주적인 삶의 체제와 자기 안에 거하는 신적인 영의 참여자이다. 그리고 하위체계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영, 창조세계에 도전하고, 지배하려고만 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이를 정당화 시킨다. 지배의식은 인간의 위기, 창조의 위기, 자연의 위기라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오히려 인간은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 축복의 표징으로 삼는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랑으로 노래했다.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당신이 지으신 그 무엇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무엇도 당신이 미워하도록 지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존속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부르시지 않는 것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므로 당신은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삶을 사랑하시는 주님과 당신의 영원하신 영은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인간, 생물과 자연의 과계 속에서 새로운 삶의 실천방안 찾아야
서양 그리스도교 대변하는 창조신앙, 환경·창조·인간의 위기 자초

오늘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과학문명과 기계문명으로 인해 생태학적 위기, 인간을 통한 자연고갈의 시대를 맞았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이 위기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자연 세계 모든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파괴는 결과적으로 지구온난화를 비롯하여 변종바이러스 감염증 창궐, 지구촌 곳곳의 사막화, 메뚜기 떼 출몰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창조론자들은 철저한 인간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인간의 삶 전체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서로 얽혀서 다른 것들과 함께, 다른 것들을 위하여 살고 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창조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안에서 활동하며, 관계는 영의 현존을 위해서 전체의 일치를 인식하게 한다. 성경은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 인간을 비롯한 자연 등 모든 창조세계는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 이를 망각해 분열되고 갈등한다. 성령을 몰각한 결과이다.

인간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연해방

생물들과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삶의 실천이 변화되지 않을 경우, 위기는 총체적 재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환경운동가들의 경고이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신앙의 발전을 비판하고, 그것을 그의 참된 근원으로부터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현대 세계의 위기는 자연의 착취를 목적으로서 하는 기술과 자연과학들을 통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됨으로써 일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힘과 초능력을 촉구하는 인간의 욕구, 인간의 욕망, 인간의 탐욕에 기인한다. 이 욕구는 그리스도교의 문화권 속에서 오해되고 오용된 성서의 창조신앙을 통하여 그 이전의 종교적 억제로부터 풀려나 더욱 강화되었다. 땅을 정복하라는 성서의 구원은 인간의 자연지배, 세계정복 그리고 세계지배를 위한 신적인 계명으로 여겼다. 인간의 힘에 대한 무한한 추구는 인간이 전능자와 비슷하게 되어야 했다. 모두 신이 되려고만 했다. 이는 결국 창조의 위기, 인간의 위기를 자초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전능을 등에 업었다. 서구의 교회, 곧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스도교에 의해 대변된 그리스도교 창조신앙은 오늘날 세계적 위기, 즉 환경위기와 창조위기, 인간의 위기에 대하여 공동의 책임을 져야한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행동에 나섰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생존하는 삶의 미래로서 전향의 길을 찾아야 위한 행동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더 이상 생태학의 위기와 자연 파괴의 요인이 되지 않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과 평화를 위한 누룩이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지구를 살려야 할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다는 애기다. 또한 그리스도교에 의해 세계화의 위기를 가속화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연과 뒤엉켜 평화를 이룰 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자연이 평화를 이루며, 함께 사는 길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한, 인류는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될 것이다. 모두가 창조의 신앙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창조론은 인간과 자연의 사귐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 안에서 완성될 그의 미래와 함께 자신의 창조세계를 관찰해야 한다. 창조의 미래는 영광의 나라로 표현되어 왔다. 태초의 창조는 하나의 개방된 창조이며, 그것의 완성은 하나님 자신이 거하는 곳이다.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영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 영원한 그의 창조 안에 거하며, 영원한 삶의 충만함 속에 참여한다. 이 때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무한한 구원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피조물 자신의 고향과 쉼을 발견 할 것이다. 피조물들은 상호간의 참된 사귐을 맛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창조를 ‘모든 사물의 공감’으로 인식하여 왔다. 이것은 다양한 ‘창조의 사귐’이 생성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 안식일에 완성

창조의 신앙은 태초부터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처음부터 안식일, ‘창조의 잔치’를 지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안식일에 완성된다. 안식일은 장차 올 세계의 모습, 하나님나라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미리 보여주었다. 안식일의 평화를 통한 천지창조의 완성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축복이다. 거룩하게 하며, 계시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다. 한식일의 쉼을 통하여 하나님은 비로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기독교인들의 한 주간은 창조의 빛, 부활의 빛으로 시작한다. ‘끝이 없는 세계’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에 대한 영원한 희망을 부여받았다. 기독교인들이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말하며, 죽어가는 창조세계의 회복을 위해서 일하는 이유이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지구의 위기, 창조의 위기, 인간의 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인간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화해와 자연의 회복을 위해서 일한다.

이런 상황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무한도전,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잃어버렸다. 이는 인간의 위기, 자연의 위기가 됐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면서, 각종 질명이 만연하고,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이 지구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다. 오늘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은 창조 이래 지금까지 자유를 위한 혁명은 끊임없이 벌여왔다. 하지만 생명을 위한 투쟁은 한 번도 벌이지 못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지구, 아니 자연, 피조물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혁명’을 단행하지 않았나.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을 전제하며, 완성한다. 이것은 오늘날 가톨릭 신학의 기본 명제가 되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로고스 안에 있다.

성육신은 창조를 전제하고, 완성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을 전제하며, 창조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완성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 은혜는 자연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준비시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며,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는 것을 연역해 낸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

창조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창조는 하나님을 통해 형성된다. 하나님 안에서 실존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안에 현존한다. 시편 104편 29-30절의 말씀은 ‘영 안에서의 창조’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피조물들은 신적인 영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인하여 지어졌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속에서 실존하며 새로워진다. 생기 있게 하는 성령은 칼빈에게 있어서 ‘삶의 원천’이었다. 성령이 모든 피조물 위에 부어져 있다면, ‘삶의 원천’은 분명 존재한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것 안에 현존한다. 실존하고 생동하는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삶의 원천’을 드러낸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창조의 사귐을 향하여 모든 피조물들과 사귐, 그리고 그들 상호간의 사귐을 창조한다.

실존의 삶과 상호간의 사귐들은 하나님의 영안에 있다. 우리는 그 분의 영 안에서 숨쉬며, 살아간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신적인 영의 우주적 관련들 속에서 다른 것들 안에, 다른 것들과 얽혀서, 다른 것들과 함께, 이들 것들을 위하여 살고 움직인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안에서 서로 얽혀,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다. 내 교회, 내 교단, 내가 속한 연합단체 및 기관을 고집하다가 분열하고 갈등한다.

모두가 영 안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본질이다. 이런 관계들은 전체의 일치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영의 현존을 드러낸다. 칼빈은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의 내제에 대한 그의 표상을 신적인 우주, 하나의 세계, 몸 안에 있는 세계, 영의 거함에 대한 스토아 철학적 관념의 마지막 한계점까지 발전시켰다. 칼빈은 스토아철학의 범신론과 구분했다.

지금까지의 주관성과 기계론적 세계지배 시대의 한계는 산업국가들에 의해 검증됐다. 자연파괴, 핵무기에 의한 핵발전은 인간, 자기위협으로 돌아왔다. 인간은 이런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적이며, 서로 결속된 생태학적 세계의 사귐이다. 성령 안에서 이를 실천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동성애반대운동을 벌이면서,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한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대변하는 서양의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창조질서파괴와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오히려 “핵무기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다”고 하나님의 창조신앙에 도전한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하나님의 영은 세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의 관련성을 창조한다. 우주적인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존속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활동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우리는 합일을 이루어야 하고,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고, 통일하고 성취시킬 영광의 나라, 미래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창조의 위기, 인간의 위기, 환경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책임이고,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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