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바로 이 처참한 정변이 일어남으로써, 극심한 정치투쟁으로 얼룩진 이 불행한 사건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의사였다. 그가 사람을 살려내자,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획기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했던 알렌의 선교적인 마음이 한반도의 사람들 가슴 속에 깊이 감동을 주어 움직이게 만드는 구체적인의 접촉점을 만들어 주었다.

알렌이 칼에 난자를 당한 민영익 대감을 치료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과정이었다. 알렌은 그 이전 어떠한 한방 치료와도 구별되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서양 외과 의술로 밤새 정성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다. 알렌이 방문했을 때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아무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우선 칼에 찔린 민영익의 자상을 깨끗이 소독하고, 꿰맨 후 붕대를 감았다. 머리의 출혈 부위는 명주실로 봉합하여 지혈시켰다. 다른 부위의 상처도 깨끗이 소독해 스펀지로 감싼 후 붕대를 감아 출혈을 막았다. 모두 스물일곱 군데를 꿰매고, 한 군데는 혈관을 경색(梗塞)시켜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였고, 상처마다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았다. 이전에 종기나 째던 한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부학 지식을 이용한 치료법을 시행했던 것인데, 해부학을 통해서 인체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한 이런 외과 치료는 당시 사람은 상상도 못했던 의술이었다. 12월 8일 민영익이 소생했다고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최고위층 민영익 대감을 치료하였다고 해서, 알렌의 소원대로 한반도에서 복음전도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의사 알렌은 권세자이나 최고 실력자 민영익을 환자로 맞아하여 지속적으로 치료하였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였는지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실력자들 치료해 주었다고 해서 복음전도가 순탄한 것은 아니었고, 알렌 선교사가 얼마나 마음에 고통을 안고서 살얼음판을 걸었던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알렌은 자신의 영달이나 신분유지를 위해서 무조건 고관대작들에게 아부하거나 절대적으로 복종해버리는 줏대 없는 자가 아니었다. 한반도의 개신교 선교가 왕궁 내에서 어떻게 이뤄졌던가를 말해주는 상황설명이 필요하다.

처음 치료 일부터 약 2개월이 되던 1885년 2월 10일자를 일기에, 알렌 선교사는 조선의 실권자 민영익에 대해서 자신이 체험한 인물 됨됨이를 평가해서 기록해 놓았다. 수술 후에 매일 같이 아침 식사직후에 하인을 보내서, 치료해 달라고 재촉하던 민영익은 처음 보는 알렌의 장화를 탐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민영익은 염치도 없이 그것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알렌은 그 장화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물품이었기에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 알렌이 더 생각해 보니 공손치 못한 태도라고 후회가 되었다. 그래서 하인을 통해서 그날 밤에 갖다 주었다. 그런데, 민영익은 그 다음 날 이 장화가 자신에게는 너무 작으니, 더 좋은 것으로 더 큰 것을 구해달라고 하인을 통해 되돌려 보내왔다. 알렌은 큰 모욕감을 느꼈다. 민영익을 치료해 준 사례를 받았었지만, 그 돈으로 비싼 장화를 사서 다시 되돌려달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알렌은 그 어떤 장화라도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런 사사로운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찬 인간이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알렌은 민영익의 탐욕을 목격한 후에 “차라리 국가를 위해서는 죽어야할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알렌의 평가는 정확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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