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학채 목사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교회는 어둠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가운데 거리는 성탄 트리로 휘황찬란하다. 오래 전부터 서구에서 생활문화로 뿌리 내린 성탄 트리는 우리나라에서는 복음선교의 수단이었다.

사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성탄절을 생각할 때마다 새삼 불우한 이웃을 먼저 생각한다. 아기 예수는 탄생부터 화려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였지만 오늘 우리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안만 가득하다.

그래서 성탄절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희망이며 마음의 안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다.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심방은 단순히 목회자들의 대접을 위한 방편은 아닐 것이다. 성도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주고 그들과 함께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런 단순하고 지극히 성경적인 이웃사랑은 우리나라에서 성탄 문화의 실종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교회보다 다른 사회단체들의 소외된 이웃이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움운동이 더 활발하다.

왜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사랑실천에는 유독 인색할까. 성탄 문화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업의 돈벌이 수단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이웃사랑도 희미해진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성탄은 가족 모임의 날이며 교회는 헌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는 특별 헌금의 날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므로 길거리에 화사한 네온사인으로 성탄 트리를 장식하여 소비자들의 향락 본능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이웃보다 자신의 즐거움이 더 소중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보다 자신의 가족과 지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몰아간다. 이것이 타락한 세속 문화다. 말하자면 교회도 목회자도 성도들도 모두 신앙보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더 좋아한다. 교회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물질적인 축복을 위한 주술적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다시 깨어나야 한다.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가족주의와 개교회주의는 결코 교회를 성장 시킬 수도 없고 신앙의 성숙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이런 식으로 망해가는 것이다.

십일조와 헌금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불우이웃돕기에 투자하는 돈은 인색하기 그지없다. 교회 헌금 대부분이 목회자들의 사례비와 교회유지비에 사용된다.

이웃을 도울 여유가 없는 이유이다. 어느 자선단체가 모금한 돈을 직원들의 쌈짓돈으로 사용한 일이 적발되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만약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 목회자 호주머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안다면 과연 지금 만큼 헌금을 낼까. 목회자들은 때만 되면 더 많은 헌금을 거둘 궁리만 한다. 그 헌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사항이다.

헌금을 거두는 것은 목회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복음선교를 위해 헌금을 내는 것이 신앙적인 설명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헌금 사용은 무엇일까. 바로 불우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돕는 일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가르침이고 사명이 아닌가.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하는 것은 교회와 목회자가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것이 바로 구원 때문이 아니던가. 교회는 성탄절을 맞아 잠에서 깨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고 이 땅에 평화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꿈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어둠 속의 성탄 트리에 불을 밝혀야 할 것이다.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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