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규 희 목사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개의 헬라어,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이해했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의 시계로 표시되는 흘러가는 시간이요, 불연속적인 우연들이 지나는 시간이며, 미래를 향해 진행하는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 사건의 특별한 의미가 담기며, 역사 저편에서 역류하면서 현실을 꿰뚫고 들어온다.

시계 속의 시간으로서 정해진 시간에 얽매여서 시간에 끌려가는 삶의 방식이 크로노스라면,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체험을 하게 되어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의 방식이 카이로스라 할 수 있다.

크로노스적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무미한 일상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 크로노스를 카이로스적 시간으로 승화시켜 사용하면 그는 스스로의 위대한 가치를 실현하고 존재감을 얻는다. 단순한 시간을 순간으로 받아들이느냐, 오래된 땀과 눈물의 결정체로서의 무한으로 받아들일 건가의 문제인 것이다.

하루 24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스스로를 성찰해 봐야 한다. 양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질적인 카이로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 버리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카이로스는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끌어안으며 상생하는 영원의 시간이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을 인식한다는 건 직선적인 시간과정을 벗어나, 진리 자체를 명증하게 관조하는 것이다. 진리의 빛을 관통하며 순간은 영원이 된다. 크로노스는 진리를 통해 카이로스가 된다는 말이다. 누구든 순간순간의 사건에 카이로스적 접근을 통해 제 생명의 의미망을 펼쳐갈 수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낸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일반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뚫고 와서 특별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았다. 비록 3년의 짧은 공생애였지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며 그 경계를 넘지 않았던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부조리와 모순, 불의와 전쟁, 가난과 억압 등을 경험한다. 크로노스의 사람은 역사의 판단에 무심하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그때 일어난’ 교과서적인 사실에만 집착한다. 자본과 시류를 좇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모른다. 가장 원래적인 카이로스적 생명성이 소멸되고 크로노스적인 삶을 살고 있음이다.

역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해하는 이에게 의미가 있다. 카이로스적 사람은 ‘그때 그 사실’보다도 ‘살아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선택한다. 그 정신이 곧 진실이며, 구원의 수원지가 된다. 지금이 곧 과거이며 미래이기에 매 순간이 절실하고 푸르다.

루터의 유명한 말 중에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앞에서’라는 뜻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람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오늘을 종말처럼 산다. 사람 앞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인간의 시간표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거나 무의미하게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묻자. 우리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 왔는가. 살고 있는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주님 앞에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살아왔는가. 그리스도인에게 그냥 흘러가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 우리의 시간이 성령 안에서 빛을 내는 시간이 되도록 가치 있게 시간을 쓰자.

예장 우리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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