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 호 수 목사
가정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이혼율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청소년들의 비행도 위험수위가 넘어섰다. 부모에 대한 효심도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우리의 가정윤리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사회범죄도 엽기적이다 못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5월은 가정의 달임에도 패륜적인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1일 경남 사천에서 아내와 남매가 재산을 노리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가장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줬다.

지난 3월에는 보험금을 노리고 전 남편과 현 남편, 시어머니에게 보험금을 노리고 전 남편과 현 남편, 시어머니에게 맹독성 농약을 탄 음료수를 먹여 잇따라 살해한 40대 여성이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4월에는 고부갈등을 겪던 50대 며느리가 80대 시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며느리는 저녁식사 도중 반찬문제로 말다툼을 한 뒤 분을 참지 못하고 결국 시어머니가 잠이 든 새벽 시어머니 방에 몰래 침입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처럼 패륜적인 범죄가 늘어나고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연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정은 사회의 근본이다. 가정의 파괴는 곧 사회의 파괴로 이어진다. 따라서 사회의 타락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가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서 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인간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가정이라는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인생의 가치관과 인간으로서 모든 도리와 윤리를 배우게 된다. 인격은 가정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므로 그 사회의 건강지수는 가정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교회가 가정목회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사회적인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가정목회가 건전한 가정공동체를 유지시키고 보호하는데 있지 않고 단순히 교회성장을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교회의 목회가 너무 실리적인 이득만을 따지고 있다는 증거다. 당장 눈앞의 성과만을 기대하는 성급한 마음 때문에 가정목회를 교회성장의 수단을 삼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가정의 복음화를 강조해보았자 그 본질적인 가치를 도외시하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는 가정목회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노인을 위한 복지선교는 물론 버려진 우리 아이들을 돌볼 복지시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사라진지 오래다.

한때 우리나라 복지사업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교회가 교회성장과 개교회 이기주의에만 매달려 온 결과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교회의 존재가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개교회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가 그 사회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건물을 확장하는 것보다 복지시설을 더 지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보다 신자 수나 교회 수가 훨씬 더 적은 카톨릭교회가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개신교 교회보다 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 원인이 바로 복지사업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랜 유교의 전통에 젖어 있던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등 복지사업에 주력한 결과였다. 이런 전통을 이어 받기는 커녕 되레 무시하고 교회건물 짓기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앞으로 민족의 복음화의 길은 험난하고 멀기만 할 것이다.

지금 우리 가정은 교회의 무관심 속에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때가 왔다. 사회의 타락현상을 보면서 말로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건전한 사회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선교적 사명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교회 안팎에서 위기에 처한 가정에 관심을 갖고, 이를 일으켜 세우는데 교회가 주력해야 한다. 이럴 때 교회가 그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성장할 수 있으며, 주민들이 교회야말로 마음의 안식처요 영혼의 쉼터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과연 우리 모두가 무너진 가정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뒤돌아볼 때다.

예장 대신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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