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진 성 목사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나라와 민족, 애국심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명을 다했다.

선교 초기 병원과 학교를 지어 병들고 무지한 민중들을 일깨우고 희망과 소망을 심어 줬으며, 일제의 압제 속에서는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를 흘렸다. 군부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정의와 평화, 인권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신앙선배들의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국심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일제 시대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과 민족구원 사역을 설교하면서 기독교의 나라사랑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았다. 확실한 성서적 근거를 확보한 한국 기독교는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선도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이와 같은 교회의 활동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성서를 불온서적으로 분류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성서를 통해 민족과 애국심을 살펴보면, 민족을 극진히 사랑한 바울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이 얼마나 동족을 사랑했던가? 동족이 자기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가는 곳마다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사코 죽이겠다고 대드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 생명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도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끝까지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민족 유대인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하더라도 내 민족 이스라엘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바다”라고 말했다.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과 그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인생을 사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예수와 관계가 끊어져버린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에게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내 동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애국심과 민족애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왔다. 그는 민족 사랑을 예수님에게서 배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 제자들을 이끌고 감람산에 오르셨다.

당신을 배척하고 처참하게 망해버릴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비통해 우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비통해 하시며, 슬피 우셨다. 예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예수님에게서 민족 사랑을 빼버린다면 복음은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절규하듯 부르짖던 민족 사랑이, 바울의 애틋한 동족애가 자신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와 민족 한 가운데로 강이 되어 흐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민족이든 그 민족의 무서운 힘과 추진력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애국심이 강하면 그 나라는 흥하고 애국심이 약하면 망한다. 우리 한국교회도 비록 짧은 역사이기는 하나, 빛나는 신앙심과 조상의 숭고한 얼을 이어왔다. 우리도 이 애국심으로 이 시대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민족정기를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애국이라는 말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애국이라는 말은 예전처럼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애국이나 민족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이데올로기쯤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6월에 순국선열들과 민족을 사랑한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면서 성서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애국심을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와 현대사, 그리고 미래의 흥망성쇠를 한국교회가 책임지고 있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샬롬교회 담임,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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