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한국 기독교인들은 언더우드 선교사나, 안펜젤러 선교사, 알렌 선교사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히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하며,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도왔던 미 감리교 선교사인 호머 헐버트(1863-1949)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190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정부는 주한 미국 선교사들에게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조선의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의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워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개입을 철저하게 막았다.

하지만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의 민족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선교활동을 펼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조선의 가난한 백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심성을 담아내는 선교를 펼쳤다. 헐버트 선교사의 선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이 됐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독립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헐버트 선교사만은 조선민족의 아픔에 함께했다.

또한 그는 1896년 고종과 세자가 궁궐을 탈출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할 때 큰 도움을 주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촉구하는 고종의 친서를 갖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는 시도도 취했다. 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분명 고종황제와 헐버트 선교사의 한과 피맺힌 눈물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헐버트 선교사에 대해서 말하는 이들은 없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이름 헐버트 선교사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며, 한민족의 의식화를 철저하게 막았던 선교사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헐버트 선교사의 업적은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그는 민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서재필 박사를 도와 조선인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기도 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기도 했다. 근대식 교육제도를 도입한 주인공이다. 그래서 헐버트 선교사를 한국의 친구라고 말한다.

헐버트 선교사는 또 우리의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아리랑의 악보를 영어로 남겨 놓았다. 무엇보다도 헐버트 선교사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먹고살기 위해 아리랑고개를 넘는 조선의 백성을 생각하며, 영어로 아리랑에 곡을 붙였을 것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또한 조선에 들어와 YMCA를 창설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조선의 청년들이 걱정스러웠다. 조선이 살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동네 사랑방에서 허송세월 시간을 보내고 유흥가에서 허랑방탕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들이 갈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그는 YMCA를 창설해 청년들이 책을 읽고, 갈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YMCA운동이 조선의 청년들이 교회로 나올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YMCA운동은 자연스럽게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또 청년들이 조선의 독립을 고민하게 했다. 그때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 등이 함께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기독교를 부담스러워 했던 이유이다. 스티븐스 암살, 이등박문 피격, 이완용 피격 등 세사건의 장본인이 모두 기독교인인 장인환, 전명운, 안중근, 이재열 의사였기 때문이다.

광복된 그해 헐버트 선교사의 나이는 84세였다. 광복된 대한민국을 보기 위해 이승만대통령의 국빈 초대에 고령의 나이에도 응했다. 그만큼 한국을 사랑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천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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