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형 진 목사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지 못하고 있다. 서구적인 추수감사절이 아니라 우리 정서에 맞는 멋과 전통을 살린 추수감사절이 되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축제적인 추수감사절이 절실하다.

추수감사절은 1620년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다음해 가을에 처음으로 거둔 수확으로 감사제를 지낸 데서 유래됐다. 잉글랜드에서 온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인디언들과 싸워야 했다. 이 때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아 줄 것으로 믿고 감사를 드렸다.

한국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은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11월 10일을 추수감사일로 정한 것이 시작이 되어, 몇 차례 수정을 거친 뒤 매년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로 함에 따라 오늘에 이르렀다. 몇몇 교회들은 자신들만의(?) 날짜를 따로 정해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교회들은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드린다.

그러나 11월 셋째 주일은 거의 초겨울이기 때문에 시기상으로나 날짜상 맞지 않는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옷깃을 여미기에 바쁜데 ‘넓은 들에 익은 곡식’이란 추수감사 찬송을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겸연쩍다. 실제로 시기상 11월 셋째 주는 수확의 계절이라기보다는 겨울을 대비하는 시기가 맞다.

그렇기에 교계 일각에서는 한국적 토양에 맞는 추수감사절을 지키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눔과 섬김의 모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해의 수확에 대한 감사예배를 드리는 날이라면,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는 기쁨도 함께 느껴야 한다. 그저 일 년에 한번 있는 절기행사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진정 가난과 굶주림에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해 나눠야 한다. 헌금의 일부를 과감히 소외된 이웃을 위해 쾌척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진정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나눌 때 비로소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되살아날 것이다.

일각에서는 추수감사절을 기독교문화 확산의 계기로 삼아야 된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며 한 해 거둔 결실을 나누는 풍성한 축제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추수감사절 문화를 보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저 각 교회별로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에 그치고 있다. 추수감사절이 기독교인을 넘어 지역 주민들과 한바탕 어우러질 수 있는 좋은 계기임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 모두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는 도시화된 풍토 속에서 추수감사절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고 나아가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도시화된 풍토 속에서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축소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일부 도시교회 목회자들은 농사도 짓지 않는 마당에 무슨 추수감사절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1년간 농사를 지은 그 대가를 하나님에게 바치는 개념보다 1년간 자신이 살아온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이러한 반문은 쉽게 수그러든다.

또한 추수감사절을 통해 거둬들인 헌금은 개교회 안에 매몰시킬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 등을 통해 주변의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11월 셋째 주, 15일을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킨다. 저마다 감사예배를 드리겠지만, 특히 올해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됐으면 한다. 또한 한국적 토양에 맞는 추수감사절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작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장 개혁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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