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성서에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마가 11장). 그것은 바벨문화에 길들여져 잎만 무성한 예루살렘을 향한 저주이다. 아니 ‘바벨문화’와 ‘맘몬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예수와 제자들의 일행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가 시장하시던 참에 멀리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가까이 갔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그 일행이 다시 그 길을 지날 때 보니, 그 무화과나무는 뿌리 채 말라 있었다. 예수님의 일행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그 길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성전숙청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다름 아닌 허식만의 종교로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오늘 열매는 없고, 부자들의 종교로 변질돼 겉치레만 화려한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가 아닌가 싶다.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예수님의 사역인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이웃, 장애인, 떠돌이들과 함께하지를 못하고, 잎만 무성한 교회건축에 모든 힘을 결집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는 봉건주의 아래서 억압당하던 여성들의 해방은 물론,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해 가난하고, 천박한 민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의료서비스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이 새생명을 얻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통해 조선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 이때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신음하던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한국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민족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그런 한국교회가 왜 이리 변질되었을까. 이는 대부분의 영미선교사와 한국교회가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외면하면서, 교회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기독여성과 기독농민들은, ‘민족적인 구원’을 담지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했다. 이것은 분명 조선독립, 민족해방이라는 목표아래 기도하고 행동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대부분 교단들이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이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3,1만세운동으로 이어졌고,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한 한국교회의 체면을 유지해 주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 불구자, 떠돌이들과 함께하고, 그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그는 정치범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아니 살해당하셨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 불구자, 떠돌이들의 가진 것 하나마저도 갈취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저주는 당연했다.

즉 열매는 없고, 허식만의 종교, 이들을 착취하는 지배기구의 본산인 성전에 대한 저주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학도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것은 아닌지(?)

신년 새해를 맞았다. 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닌,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로 변화되어야 한다. 2015년 한국교회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했는가(?) 한번 뒤돌아보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 불구자, 떠돌이들을 위한 하나님나라 선교를 펼쳐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잃어버린 위상을 회복하고, 한국교회 앞에 희망과 소망이 넘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펼쳐지는 길이다.

인천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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