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성서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참생명-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에 참생명을 얻으려면 자기 부정의 길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참사랑은 자기부정이다.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잃는 것이 인간생명의 파라독스이다.

이 말씀에 대한 근대의 휴머니즘, 그리고 신학사상에서 말하는 자유주의의 그리스도교, 이러한 것들을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 식의 해석이 있다.

장사거래에 있어서 처음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거래를 하면 차차 신용을 얻어서 나중에 처음 손해를 만회하고, 흥황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 그러나 나중에 더 잘되기 위해 지금 손해를 보겠다는 자본주의 장삿속과 죽도록 충성해서 사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신앙과는 전혀 다르다.

이를 놓고 사람들은 영리한 방법, 어리석은 미신이라고 비웃는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본주의 식으로 번역해 버린다. 이렇게 자본주의 식으로 번역된 그리도스는 밀려오는 역사의 물결에 덮이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공산주의의 반신론, 과학주의의 무신론, 실존주의의 사신론과도 싸워야 하겠지만, 자유주의 그리스도교에서 하는 복음의 그릇된 해석과도 싸워야 한다.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는 말은 더 잘 내다본다는 영리한 사람들의 처세술이 아니다. 이것은 아카페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한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코자 함이란(?)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를 말할 수 있다. 사람 속에는 이러한 두가지 자아가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내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도다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미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여기에 자기분열이 묘사되어 있다. 본래적인 자아와 한 다른 자아. 이상적인 자아와 그 이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아, 창조된 대로의 자아와 타락한 자아 등등으로 분열되어서 자기가 자기에게 일종의 자기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자아가 속한 두질서는 인류 공동체험을 말한다.

이는 비단 한사람의 경험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의 경험, 즉 역사의 운명이기도 하다. 역사의 진로란 문명의 진보라고 말한다. 문명이란 인간생활을 위한 자연정복이며, 이용이다. 원시인의 손에 칼이 쥐어졌을 때는 문명이 진보했다. 이 손에 화약을 갖게 되었을 때는 이웃정복이 훨씬 수월해 졌다. 원자력을 갖게 되었을 때는 역사의 의도를 배반하고 말았다.

역사의 진로에서 우리의 의도가 성취되기는커녕 내가 하는 것을 내가 모르게 되고 도리어 내가 미워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문명이 배반하게 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자기분열, 자기모순을 경험하게 된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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