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믿음과 생활(?)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당이 세워져 있다. 교회가 슈퍼마켓만큼이나 흔해졌다. 이것은 한편에서 생각하면,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넘쳐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교회다운 교회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있느냐고 묻고 있다. 이 물음은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다운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사실 자신이 받은 진리와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것이 진짜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교인들 중에 성령을 도매금으로 방매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헐값으로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십자가가 동네마다 우뚝 솟아 있는데, 아니 수천억씩 들여서 웅장하고 호화스러운 교회당을 건립하고 있는데, 이를 “잘했다”고 칭찬하는 이들이 정말 없다. 빚을 내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빚을 갚지 못해 이단단체에 교회당이 팔려 넘어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이를 잘했다고 칭찬하겠는가. 이 돈으로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떠돌이, 병신들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이렇게 곤두박질하지를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런 말을 듣는 목회자,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들의 마음은 그리 편치가 않다. 또 강단에서 이것이 진짜 교회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이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는 자들에게 과연 그리스도가 함께 하실까(?)하고 그리스도인이나, 세상 사람들은 항상 의문을 갖는다.

수많은 첨탑, 수천억원을 삼키면서 버티고 있는 교회당 건물에 그리스도는 있을까(?) 예수그리스도는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길을 헤매는데, 로마 군병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 아니 어디로 오실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임을 당한 후 그의 부인은 미국의 한 대학교 졸업식의 축사에서, 학생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요. 부유한 백인들의 교회로, 백악관으로 오실까요. 아니 예수님은 할렘가. 가난과 범죄가 들끓고 인간이 신음이 그치지 않는 그곳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외쳤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라. 호화로운 교회당은 부자들이 많은 곳에 세워지고, 교회는 부자들의 마음에 들게 치장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리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된다.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야 한다”는 말은 궤변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의문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성령을 도매금으로 방매하고, 복음을 헐값으로 뿌리며, 행동하지 않는 그곳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맑고 깨끗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충혈된 눈이나, 허위의식으로 가려워진 눈으로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를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기 위해 역사의 흐르는 물줄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미세먼지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다툼의 소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소리를 구별해 낼 수가 없다.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를 않는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행동하지 않는 교회, 행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과연 예수님이 여기에 계실까(?) 하고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예민한 청각, 분열과 다툼의 현장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성령을 방매하고, 복음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교회 모습 변화돼야
행동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때 완성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세상 속에서, 아니 오염된 복음 속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마태복음 25장 22-30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예수님의 교훈이 있다. 이 성경구절은 하나님나라 비유에 속한다. 이 성경구절 앞부분에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온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 신랑을 맞았다.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어 신랑을 맞지 못했다. 그리고 잔치에서 쫓겨났다. 뒷부분은 대심판의 이야기이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고 했다. 이 두이야기는 이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1달란트를 받은 자도, 돈을 땅에 묻어두지를 않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겨 왔더라면, 2달란트, 5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종의 행위가 하나님나라의 기쁨, 즉 주인의 기쁨과 관련해서 말하고 있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와, 2달란트를 받은 자와 5달란트를 받은 자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행동했다. 하나님나라의 기쁨, 즉 주인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다. 이들은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충실히 일했다.

그런데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곡간에 재물을 쌓아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교회의 재정과 재물을 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에 문제가 있다. 주어진 현실에 매달려 하나님나라의 선교를 위해 행동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재물을 쌓고,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기에 바쁘다. 한마디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보관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1달란트를 받은 종은 3가지의 잘못을 범했다. 하나는 종의 의무를 회피했고, 다음은 종이 주인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했다. 마지막은 행동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다. 이 종은 분명 잘못을 저질러서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을 안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이 1천2백만명이라고 자랑한다. 이 많은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종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잘못된 세상과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자

또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더 충실하다. 자신의 안전을 제일로 여긴다. 그렇다보니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남한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리고 한반도 상공을 떠다니는 핵으로 무장한 폭격기에 찬사를 보내며, 안심한다. 한반도 전체가 망한다는 것을 몰각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 자신에 충실하고 있는 보수적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노래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기쁨인 동시에 민족의 기쁨이다. 그리고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하면 무엇 하겠는가(?) 말이다. 행동으로 민족의 아픔이며, 소원인 한반도의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한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위협이 되더라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향해 일어나야 한다. 그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 달란트를 땅에 묻고, 안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자.

분명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하고,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될 수 있으면, 적게 행동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행동하는 종교라는 진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믿음과 은혜는 아주 좋은 단어이다. 하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 지지 않으면,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현실이 약하다고 외면하면, 손해 볼 것이다. 두려워 장사를 집어치워 버리면 1달란트를 받은 무능한 종과 무엇이 다른가.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나가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머무는 곳,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떠도는 떠돌이, 육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병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이들을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들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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