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이 핵실험(수소탄실험)을 강행한데 이어 지난 7일에는 ‘광명성 4호’까지 발사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남한 정부가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를 이유로 개성공단을 폐쇄함으로써 남북한 관계는 사실상 중단된 채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간 통일운동에 매진해 왔고, 특히 광복과 분단 7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각종 기도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며 평화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열망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노력과 성과는 자칫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과거 평화통일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온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환경의 변화와 정부 주도의 통일 논의 속에서 역할이 축소됨은 물론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성서적인 관점에 입각한 평화통일의 방향성을 재정립함과 동시에 이를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교회 입장 저마다 제각각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해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면서 한국교회 각 기관들은 저마다 논평을 내고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각 기관들의 입장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기장 등 교계 진보진영에서는 남북관계의 파국을 우려하며 개성공단 폐쇄결정을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반면 교계 보수진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개성공단 폐쇄는 물론 추가적인 강력한 제재를 요청했다. 한국교회연합도 “북의 거듭된 안보 위협에 대한 최후의 자구책”이라며 한기총과 비슷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의견이 제대로 모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방향성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통일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효율적이고 일관된 집중력 있는 통일운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따라서 우선은 평화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재정립할하고 이를 하나로 집약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 고수해야
한국교회는 통일운동을 펼쳐나감에 있어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교회협은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통해 줄곧 한반도 비핵화뿐만 아니라 전 세계 비핵화의 원칙을 천명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거나 핵무장을 한 후 북한이 폐기할 경우 동시에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지만 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외쳐야 한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를 외쳐 온 한국교회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과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진영을 막론하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통해 북한 동포의 식량문제 해결에 보탬을 주고, 대화와 교류의 확대로 화해를 모색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것은 한국교회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다. 일각에서 ‘북한의 배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러한 요인에 의해서이다.

전문가들은 북핵 문제가 동북아시아의 근본적인 상황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전에 재래식 무기로 대결하던 관계에서 이제는 핵으로 대결해야 할 상황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핵무기와 군비경쟁을 통한 무력으로는 절대로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핵무기는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를 전쟁과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변국과 더불어 사는 평화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성으로 가서 심판과 회개를 외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를 피해 정반대에 위치한 다시스로 도망을 쳤다. 이방민족을 향해 외치면 그 도시와 백성이 회개할까봐 싫었던 것이다.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요나가 탄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되고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갇히는 신세가 된다. 결국 그는 니느웨성으로 가서 심판설교를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지만, 니느웨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는 못한다. 이를 본 하나님은 요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요나 이야기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요나를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니 지금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은 자기 민족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나서는 하나님은 요나와 유대인은 물론 이방민족인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도시의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이웃 나라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또한 더불어 살지 않으면 평화가 깨진다는 것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초월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남한은 물론 북한도, 미국도, 러시아도, 중국도, 일본도, 더불어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들 모두가 더불어 사는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6자 회담이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정부와 다른 차원의 통일논의 필요
한국교회는 과거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주도해 온 자랑스러운 전통을 갖고 있지만 갈수록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이미 지난 80년대, 사회의 모든 분야가 독재정권의 억압 아래서 통일문제와 관련된 견해를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교회협을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는 정부의 방해를 뚫고 통일문제협의회를 꾸준히 개진해 왔으며, 여기서 이루어진 논의를 바탕으로 1988년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88선언’은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해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왔던 일들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고백한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사의 중요한 이정표였으며,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차별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같은 한국교회의 노력은 세계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식 기독교단체인 조선기독교도연맹(당시)의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에 따라 남북한의 교회는 사회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먼저 남북 교류를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정부가 대북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교회의 통일운동은 점차 그 입지가 작아지기 시작한다. 정부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변한 만큼, 기독교 이외의 다른 부문들이 통일문제에 접근하는 길이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부문인 교회가 정책을 좌우하는 정부의 논리와 능력을 뛰어 넘기가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통일운동은 통일과 관련된 논리의 개발이나 정책제시보다는 남북한 교회의 교류와 만남, 그리고 북한 지원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부 주도의 통일논의가 갖고 있는 가장 뚜렷한 한계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우리 사회의 통일논의를 독점하고 주도할 수는 있지만, 주변 정세의 흐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는 사실상 자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가 그동안의 통일운동을 통해 나름대로 세워 놓았던 원칙과 신앙적 양심에 충실하게 정부의 정책을 비롯한 사회의 통일논의를 감시하고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88선언’을 통해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 민중우선, 인도주의’라는 다섯 가지의 통일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통일논의의 주도권이 교회로부터 정부 당국으로 넘어간 이후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이 원칙들을 실천에 옮기기보다는, 대북지원을 빌미로 한 남북한 교회의 만남과 교류에 더 집착하는 듯한 과거의 모습을 계속 답습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세워진 원칙들을 견지하면서, 정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통일논의를 열어 가야 할 책임이 한국교회에 있는 것이다.

△생명과 평화를 노래하라
통일논의가 정부 주도로 진행되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이 침체일로를 걷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이야말로 기독교적인 통일운동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남북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의식이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균열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수 세력이 득세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은, 남북한의 화해보다는 과거의 냉전적 사고에 기반을 둔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확산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다시 한 번 전쟁 분위기의 확산을 저지하고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신학적 논리를 개발해 확산시키는 일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에도 무력의 사용이나 전쟁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으며, 남북한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민족의 생명을 살리고 더 나아가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길임을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인식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에 줏대 없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가 동북아의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 통일은 남과 북이 주체가 되어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점은 명확하다. 따라서 교회는 한반도 내부의 문제를 우리 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독교계의 통일운동과 통일논의는, 통일의 과정이 단순히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남북한의 국민들을 비롯한 피조세계 전체의 생명을 지키고 보장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통일논의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삶이 가장 중요한 의제 중의 하나로 부각돼야 하며, 생명을 거부하는 어떤 형태의 통일논의나 과정도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세워 놓을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전제한다면, 통일논의는 신앙을 비롯해서 경제와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왜 무력이나 폭력을 거부해야 하는지. 그리고 아무리 상황이 어렵게 흘러가도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은 왜 반드시 계속돼야 하는지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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