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으로 비대해진 교회, 예수가 있는 곳에서 참된 복음 증언해야
민족의 아픔인 남북한 민족 하나 됨과 한반도 비핵화 위한 노력도

기존의 제도적인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최근 30년 동안 가톨릭교회는 교인 수가 100만에서 600만으로 늘어났다. 개신교 역시 1천만명의 교세를 자랑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도시나 마을마다 교회의 십자가로 넘쳐나고 있다. 이제 경찰, 군대, 교도소, 예비군까지 교회의 입김이 깊이 스며들었다. 또한 교회가 권력과 밀착돼 기독교가 국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런데 양적으로 비대해진 교회, 권력과 밀착된 교회, 부자가 된 교회들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 의문은 교회가 그만큼 하나님나라운동에서 이탈되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리고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 죽임을 당하는 자들에 대해서 아랑곳 하지를 않고, 호화스럽고 거대한 맘몬교회당을 짓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 헌금을 부동산에 투자하고, 사채놀이를 하는 교회까지 등장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타락한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위상과 정체성이 크게 추락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이, 교회와 사회의 부패와 몰락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교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를 평가할까(?) 도시교회들은 대부분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질돼, 가난하고, 소외되고, 장애인, 떠돌이 등이 접근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교회당은 부자들의 입맛에 맞게 호화롭게 꾸며지고, 교회당도 이들에게 맞게 거대해졌다. 과연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교회가 가난한 이웃과의 두터운 장벽을 치고 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기 시작했고,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휴면상태에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신학자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교회가 몰락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에다 목회자들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은 교회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얼마 전 부천에서 일어난 13살 된 딸 살해사건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그것도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딸을 살해하고, 주검을 11개월 동안 방치한 것은, 목사로서 아니 신학대학의 교수로서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성남에서는 목사가 부인을 살해해 토막을 내고, 시신을 자신이 살고 있는 앞마당에 매장한 사건 또한 충격이었다. 또한 목회자의 윤리적인 타락과 도덕적인 타락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러한 일부 목회자들의 타락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교육하기 보다는, 참복음을 교육하기 보다는, 맘몬과 바벨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돈!돈!돈의 돈!돈!을 외치기 바쁘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데 헌금의 액수로 결정되는 세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교회들은 십자가 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공룡처럼 비대해진 한국교회의 존망은, 눌리고 빼앗긴 가난한 이웃과 교회의 부와 인적자원을 나눌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를 가늠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르지만 예수와는 등을 졌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 현상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선교의 경쟁을 갖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는 결단해야 한다. 부자 청년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거부했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죽어서 잔해만이 역사적 유물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이, 생각 있는 신학자들의 경고이다.

이와는 반대로 삭개오처럼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나누면, 그 교회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부자교회들이 재정의 상당부분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재투자해야 한다. 그것만이 교회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침체된 교회성장의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또한 한국교회의 과제는 남북분단을 극복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진정 화해와 평화, 그리고 해방의 복음이라면, 민족의 아픔이며, 소원인 남북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은 북한만을, 아니 남한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한민족 모두를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기쁨과 생명,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있다.

▲ 한국교회는 호화롭고, 거대한 교회당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여!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라!

십자가는 교회의 지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적대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남북분단의 자리에 있다. 이것은 남북한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위해 교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분명 선교는 북한만의 선교가 아닌, 남한만의 선교가 아닌, 한민족 모두를 위한 선교가 되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본래적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다. 또한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나라 운동을 실현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부자가 된 나머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과 반대되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또한 복음의 연속성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정체성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는 공동체적인 운동을 펼쳐야 한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이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데 서글프다. 과거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신, 떠돌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실현했다. 이 때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선교초기에 그랬고, 6.25 한국전쟁 이후 고통당하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고, 세상을 향해 교회가 열려 있을 때 그랬다. 또한 70-80년대 교회들이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의 십자가 탑이 높아지고, 교회 안에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면서,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고통당하는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면서, 교회는 쇄락했다.

하나님나라운동의 교회는 내적으로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의해, 외적으로 사회체제에 의해 이중적인 제약과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툼과 분열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할 그 시간에 분열과 갈등을 일삼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했다. 대신 교회의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교회의 위상은 한없이 추락했고, 나눔과 섬김의 예수님의 정신은 실추됐다. 오히려 교회 지도자들의 끝없는 윤리적인 타락과 욕망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분명 교회가 행동하지 않은 결과가 낳은 것이라는데 이유가 없다.

이런 연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의식 있는 신학자들은 한국교회를 향해, 아니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행동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호화로운 시멘트 속으로 불러들이는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 이제 한국교회는 행동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가 있는 곳으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생명과 사랑, 예수님의 행동하는 초월적인 신앙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추구했던 평화와 평등, 그리고 참자유의 복음이다.

남북분단을 극복하는 복음을 실현하라

과거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박한 사람들을 향해 평등과 평화, 자유의 참복음을 외쳤을 때 크게 부흥했다. 그리고 해방이후 전쟁과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민족을 향해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분단된 조국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했을 때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부자가 된 이후, 교회의 강단에서는 자유와 평화, 평등의 복음이 아닌, 맘몬의 상징인 ‘돈’이 외쳐지기 시작했고, 민족의 아픔인 한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교회마다, 각단체가 주최한 집회에서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한 기도를 어김없이 드리지만, 그 기도는 말만 앞세우고, 행동으로 보여주지를 못했다. 분명 평화적인 민족통일과 한민족의 복음은, 북한만의, 아니 남한만의 복음이 되어서는 안된다. 남북한민족 모두의 복음인 한민족의 복음, 한민족 모두가 참여하는 복음과 통일이 되어야 한다. 분명 세계 역사와 한민족의 역사, 그리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외쳐진 평화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준 선물임을 고백해야 한다. 참된 평화는 무기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기도하고 노래하는 한국교회는 평화가 없는 민족과 세계를 직시하고 증언해야 한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1986년, 한길사)에서 “△기독교인은 민족분단과 군사적 대립관계를 방관하면서 평화를 기도하고 노래할 수 없다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자관계, 사회에서의 빈부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한 관계가 존속하는 한 평화란 없다 △세계의 패권자들을 위해서 종노릇하는 과학기술, 산업화와 핵무기생산, 핵원자력 개발은 약소민족과 약자들을 예속시키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파괴시킨다 등등을 지적하며, 한국교회의 기도는 죽임을 당하는 자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민족과 세계를 하여금 죽음의 세력을 너머에 약속된 부활과 새 나라를 증언하는 계기를 희망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등으로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한 민족 모두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민족의 아픔이며, 소원인 분단극복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교회를 옮겨야 한다. 노숙자가 있는 곳, 떠돌이들이 있는 곳, 병신들이 있는 곳,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쪽방촌,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정치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아프리카 및 중동의 난민, 북한 자유이주민 등등)이 있는 그 곳을 찾아 자유와 평등, 평화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에 주어진 하나님나라운동의 선교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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