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세상의 이혼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서로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했지만, 이제는 서로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유도 제각각이다. 우울증 등 정신적인 이유로, 경제적 사정으로, 혹은 신체적 질환 등 천차만별의 핑계를 들어 양육권 포기에 열을 내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뀐 것 같다. 그 속에서 상처 받는 것은 부모에 의해 버림받는 아이들이다. 최근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가 ‘우울증이 심해서, 직장 때문에’ 서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고 법원에 하소연한 사건이 있다. 이들 부모는 맞벌이를 하면서 유치원생 딸은 자영업자인 친정 부모에게, 아들은 임대업을 하는 시부모에게 맡겨 기르다가, 결국 이혼소송까지 갔다. 부부는 이혼하기로 동의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아이 양육권 문제다.
 
흔히 드라마 등을 통해서 본 양육권 문제는 서로 포기하지 못해 다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모습은 정 반대였다. 서로 양육을 못하겠다고 때를 쓴 경우다. 이들 부부는 우울증과 불면증, 직장문제 등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상대에게 떠넘기기 바빴다. 이런 가운데 두 자녀는 서로 떨어지기를 원치 않았고, 함께 살기를 원했다. 아직 열 살도 채 안된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든 상황인 셈이다. 이들에게는 부모의 행동이 곧 폭력이다.

이에 법원은 부부에게 각자 한명씩 자녀를 양육하고, 양육비도 전액 각자 부담할 것을 판결했다. 또 남매에 대해 성년이 되기까지 매달 두 차례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다음 날 오후 7시까지 만나도록 했다. 더불어 여름과 겨울 방학에는 각각 5일간, 설날과 추석연휴에는 각각 2일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가까스로 남매의 생이별은 막았지만, 부모라는 사람들이 과연 이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서로 좋아서 만나 축복 속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은혜가운데 소중한 자녀를 뒀다면 끝까지 책임져야할 것이 바로 부모다. 그러나 작금의 시대에 부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부정한 부모를 칭하는 것 같다. 그만큼 부모로써 응당 지켜야할 것들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부모의 탈을 쓰고, 자녀를 때려 숨지게 하거나, 배움의 기회를 앗아 가거나, 심지어 폭력의 도구로 삼기도 한다. 의붓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고, 계모가 아이를 채찍질하는 모습만 봐도 이 세상은 부모란 정의가 무색할 정도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아빠의 얼굴을 만지며 유대감을 표하는 아이들을 냉정하게 쳐내는 부모들의 행태는 마귀와도 같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작금의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어린 생명이 모진 채찍과 무관심이란 폭력에 상처받아 울고 있다. 또 자신을 낳아 길러주지 않고, 오히려 남에게 전가하려는 모습에 멍든 가슴을 가진 아이들의 수도 헤아리기 힘들다. 누가 이들에게 이토록 가혹한 폭력을 가한다는 말인가.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다.

왜 부모들은 아이들을 때려야만 폭력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을 두고 서로 키우지 못하겠다고 법정에 서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모르는가. 평생 멍든 가슴으로 살아갈 아이들을 진정 모른 척 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이는 갖은 멸시와 조롱,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비슷하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뿌리 깊게 박힌 이 폭력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그 어떠한 폭력에도 정식으로 맞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순절을 지키는 우리들의 자세다.

인천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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