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타락한 인간을 생명이 충만한 에덴동산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구약학자들은 이것을 야훼 하나님의 역사 경륜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것은 먹지 말라는 선악과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들도 선악을 아는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있는 사람을 자처하면서, 사람 위에 군림하여는 것이다.

뱀이 속삭이는 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육의 유혹이다. 육은 언제나 자기만을 생각하게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육이란 언제나 자기만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오용하여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도 유혹에 넘어가서 이슬라엘 백성을 어렵게 만들었다.

어린들은 자신의 존명을 위해서 아주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피곤에 지친 엄마를 아랑곳 하지를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병들어 죽어가는 엄마를 보면서도 젖을 다라고 떼를 쓴다. 그럼에도 엄마는 조건없이 자식에게 젖을 내어 준다. 이것이 바로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던가.청소년들도 자아를 확립하면서 부모의 뜻에 역행한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보면, 사춘기에 든 청소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아들은 부모의 재산 반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육신의 유혹에 빠져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부모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를 그릇되게 쓰실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억압의 사슬에서 우리를 빼내어 자유를 영위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바로왕의 폭압정치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에수님은 간난하고 소외된 사람, 병신, 떠돌이들이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유의 은혜를 주셨다.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하와와 아담도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아들 사이에 비극이 벌어졌다. 힘의 철학에 사로잡힌 형 가인은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그릇된 질투심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약육강식은 악이 만들어지고, 죽임의 비극이 벌어진다. 에덴동산의 평화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는 이렇게 깨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 육의 충동에 따라서 잘못된 길로 갈 것을 아셨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은 대책을 마련하셨다. 성서는 강자들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약자들을 통해서 창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약자들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들 속에 있는 생명을 갈구하는 영이 피어나 새 내일을 창출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약자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주셨다. 셋의 후손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창 4:15-26)

셋의 후손에서 노아가 태어나고, 노아가 홍수에서 건짐을 받은 뒤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는 이런 저주가 반복되지 않는 새 내일을 약속하셨다(창 9) 또 그의 후손에서 인류 역사를 새 차원으로 승화시킬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강자들의 쟁탈전에서 밀려난 떠돌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하나님이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떠돌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부풀어 올라 새 역사를 창출하신다는 것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떠돌이 아브라함에게 세가지 큰 축복을 주셨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이루셨다.

인천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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