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통하여 민족들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좌정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병신, 떠돌이들을 엄신 여기며, 이들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이들의 삶은 한마디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강도와 같은 자들이라고 질책 하셨다. 예수님은 악을 직시하고,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을 높은 산 위로 데리고 올라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게 하면서, 예수님이 자기 앞에 절을 하면 모든 것을 줄 것이라고 유혹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에게 힘의 철학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숭앙하는 다윗 왕, 그리고 지중해 연변을 힘으로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황제 가이사를 위시한 모든 바벨탑을 신봉하는 자들의 뒤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성서에는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라 하지 않았느냐”고 기록되어 있다. 일거에 사탄을 물리치셨다. 오늘 바벨과 맘몬에 길들여진 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시내산에서 맺은 첫 번째 계약은 떠돌이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섬기지 않기로 한 서약이었다. 스스로 절대자라고 하면서, 힘을 오용하는 자들은 자신의 뜻을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백성들을 노예로 쌓는 등 악마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물론, 다윗 왕을 비롯한, 그 뒤를 따른 왕들이 다 그랬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 바로 왕의 노예에서 출애굽 40년 동안 광야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웃나라들도 꼭 같은 과오를 범하여 패망의 길로 치달았다. 하나님의 뜻을 안 예언자들은 왕들의 이러한 행태를 규탄하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포했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왕들의 말로는 한마디로 비참했다. 반면 예언자들의 경고를 받아들인 왕들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힘의 철학에 사로잡힌 왕들은 가던 길을 멈추지를 않았다. 나라가 위험에 직면하게 되자 왕과 백성들은 다윗의 후예에서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되찾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시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나라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리고 인류를 패망의 길로 몰고가는 바벨탑의 정체를 명확히 하시고, 거절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교회는 돈이 바로 신이 되었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예수님의 교훈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를 잊은 채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살고 있다.

교회마다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대형교회당을 경쟁적으로 건축하고, 십자가탑을 하늘 높은 줄 높이 모르고 쌓고 있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소돔과 고무라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 곳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한국교회야 말로 더욱 걱정스럽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호화로운 교회당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세상 속으로 나가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한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