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것은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정통보수주의 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문화의 권위주의를 낳았고, 경쟁적인 호화로운 교회건축의 경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고, 교회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일각에서 교회가 예수님의 정신인 나눔과 섬김, 그리고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만이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세우고, 선교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선교의 첫 번째 목적

예수님의 선교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는 생명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이다. 예수님은 40일동안 기도하면서, 소유할수록 행복하다는 물질주의를 물리치셨다. 그리고 나눔과 섬김의 생명공동체를 이루셨다.

물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 분명하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행동 하셨다. 이것은 바벨문화와 다윗문화, 그리고 맘몬문화에 길들여진 강자들이 물질을 독점한 상황에서, 대다수인 떠돌이와 가난한 사람들을 기아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생명의 먹거리를 나누어주는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식탁에 둘러앉아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전통을 세웠다.

특히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천대받으며 낙인찍힌 세리와 창녀들까지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셨다. 성서에 나타난 세리장인 난장이 삭개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인 것과 세리 마태의 집에서 나눈 식탁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성서의 기록은 나눔의 정신이 깃든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성서의 경제정의, 아니 예수님의 경제정의는 한마디로 나눔이다.

헌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기독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모습을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교회의 탑이 높아지는 만큼,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 병신, 병든 자, 떠돌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부자들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교회경제를 내세운 헌금강요는 이제 도를 넘었다. 교회 내에서 ‘경제’를 주제로 한 세미나도 심심찮게 열리고 있다. 이 세미나의 강사는 대부분 영미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이들의 입에서는 교회가 부자되기 위해 헌금이 절대적이라는 목소리가 거침없이 나온다. 한마디로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이야기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행동하지 않는데, 누가 헌금을 드리겠는가(?) 말이다. 예수님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이 실종된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 보니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 떠돌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과거 한국교회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의 해방과 평등,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행동한 결과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해방이후 불안한 사회 속에서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펼쳐,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피압박민족의 아픔을 몰각하고, 식민지세력에 협력하면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유리방황하기 시작했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이 민족의식을 몰각하고, 식민지세력에 붙어 온갖 혜택을 누리며, 식민지세력에 협력했을 당시, 또 교인들은 교회를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민족의식을 자각한 민족어머니, 기독농민들에 의해서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의 명맥이 유지되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십자가 탑 ‘힘의 철학’ 상징

나눔과 섬김의 인정공동체 실현해 교회의 선교경쟁력 극대화해야
행동하는 교회만이 하나님나라운동의 선교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 오늘 교회는 바벨문화와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나눔과 섬김의 인정공동체를 상실했다는 지적의 목소리 높다.
다윗문화의 권위주의 청산해야

기득권자이며, 거룩하다는 이 땅의 지도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교회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죄인과 세리들과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비판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그들을 향해 자신은 수탈당하여 병든 자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응수했다. 오늘의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 역시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해 왔다.

목자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한 것이다. 저들을 이렇게 만든 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가난한 군중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위해서 왔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회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고,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에도,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서의 경제정의는 ‘나눔’

예수님은 자기만을 위한 창고를 크게 짓는 것이 미련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다. 한국교회는 목회자 한사람을 위해서 교회당을 크게 짓고, 교회의 헌금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모습은 분명 성서에 배치되는 것이라는데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보니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교회당은 그 어디에서도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겠다며, 설립된 교회들마저도,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져 기성교회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 안에서 사랑과 나눔이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분쟁은 돈과 관련되어 있으며, 육의 문화인 다윗문화와 탐욕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성서의 중심사상인 나눔과 섬김, 그리고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것도 서로 용서하기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목회자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사랑도, 용서도 없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으며, 분쟁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보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것은 물론,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이 분쟁을 위한 고소고발 사건의 변호사 수임료로 새 나가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관이 아니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목사가 부인을 죽여서 주검을 유기해도, 목사아빠가 딸을 살해해서 수개월동안 주검을 유기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세태가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목사와 교인들은, 목사 한 두 사람이 그런 것이지 목사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무엇이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는가(?)

분명한 것은 육의 문화인 탐욕에 너무나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면서 자신의 티는 보지 못하고, 이웃종교를 멸시하며, 터부시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도 힘의 철학으로 말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힘의 철학이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다. 가난한 교회들은 부자교회에 먹히고,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와 정치꾼들은 부자교회에 기생하며, 사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힘의 철학을 배격해야

예수님은 힘의 철학을 배격하셨다. 그는 악의 근원을 권위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보셨다. 힘의 철학을 바벨탑의 뿌리로 보신 것이다. 그리고 권위주의의 화신인 다윗왕의 전통을 배격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다윗의 전통인 권위주의에 매몰돼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권위주의는 있지만, 섬김의 모습은 없다는 것이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그곳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거꾸로 말하면 한국교회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교회는 점점 선교의 경쟁력을 상실하고,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나 침몰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이미 기울어진 한국교회호를 건지기에는 역부족한 상태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십자가 탑을 높인 한국교회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결론이다.

한마디로 과거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고, 이들을 섬겼을 때 교회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잊은 결과가 불러온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며,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을 때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섬김의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가 바벨문화와 맘몬문화에 길들여져 부자가 되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다. 이들은 교회보다는 성당을 찾았고, 성당마저 이들을 버리면서, 사찰을 찾았다. 이것은 분명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 선교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유혹으로 만들어진 바벨탑에 대치되는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생명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또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난한 마음, 슬퍼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자비를 베푸는 마음, 깨끗한 마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마음, 옳은 일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용의가 있는 마음 등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선교의 경쟁력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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