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다. 해맑은 웃음기는 사라지고, 원망 섞인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세상을 향해 “우리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처절한 ‘피의 절규’는 세상의 것들에 묻혀버리고, 어른들이 정해 놓은 규정대로만 살아갈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틀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사회적 처벌에 몸과 마음이 멍들어 죽어가고 있다. 때로는 어른들의 무관심에, 혹은 혹독한 관심에 고사리 같은 아이들이 채 펴보지도 못한 채 허리가 꺾인다. 그래도 조그마한 새장 속에 갇힌 아이들은 대답 없는 외침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살고 싶다”, “나도 꿈꾸고 싶다”, “우리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이다.

누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모는가

 
5월 어린이주일과 어린이날을 앞둔 시점이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 없다. 누구보다 존귀하게 보살핌을 받아야할 우리 아이들이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들이 어른들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해 매질을 당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분명 인권이 존재함에도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철저히 짓밟고 있다. 부모의 훈육이라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줘야 할 부모들이 되레 죽음으로 내 몰고 있다.

실제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이 공개한 ‘2015 전국 아동 학대 현황’에 따르면 아동학대는 2011년 6058건, 2012년 6403건, 2013년 6796건, 2014년 1만27건, 2015년 1만1709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최근 5년간 아동학대 사건이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대 가해자의 75.5%가 친부모였고, 계부모와 양부모까지 합하면 80%에 달한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잔악무도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동학대는 단순히 폭력으로만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살인에 이르기 까지 가정이 파괴되는 일이 쉽게 자행되고 있다.

우리는 앞서 계모가 아이를 폭행해 갈비뼈골절로 폐부를 찔러 사망한 ‘울산계모사건’을 비롯해, 식사도중 아이가 김치를 남겼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한 ‘인천어린이집 사건’, 초등생 아들을 때려 숨지게 한 ‘부천초등생 토막사건’,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건, 울산 울주 여아 학대 사망 사건, 부천 백골 사건 등등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무서운 아동학대의 사례를 심심치 않게 접했다. 여전히 20여명에 가까운 미취학 아동들의 생사는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드러난 것만 이정도인데, 그동안 감춰지고 철저히 은폐된 사건들은 얼마나 심각할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만큼 아동학대는 우리 사회에 심각한 병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를 막기 위한 법적인 조치나 규정은 미약한 수준이다. 뒤늦게 아동학대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항상 뒷북만 치고 있는 수준이다. 더욱이 부모가 아이들을 훈육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 더욱이 가족의 범주가 점점 축소되는 가운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는 것을 방조하고 있는 셈이다.

당장 옆집에서 한 아이가 부모라는 탈을 쓴 악마들에게 각종 폭력을 당하고 있음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자신마저도 아들과 딸을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매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매정한 부모들의 학대로 가장 행복해야할 순간을 오히려 지옥 같은 나날로 보내고 있다. 천륜을 저버린 부모들의 짧은 생각이 아이들의 미래를 짓밟고, 장차 이 나라의 성장 동력마저 꺼버리고 있다.

꿈마저 앗아간 기회주의 교육

하지만 이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 채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과학자, 대통령, 운동선수 등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작금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른들이 정해놓은 바른 길(?)로 가기 위한 열차에 탑승한다. 아이들은 어린이집부터 부모들이 원하는 아이로 성장해 간다. 자신은 왜 살아가는지 이유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부모와 이 사회는 아이들에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무조건 따르라고만 강요하고 있다.

또 1등만을 원하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회주의 교육에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을 제대로 구사하기도 전에 영어를 배우고,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기도 전에 세계사에 길들여져 간다. 같은 반 친구들은 그저 자신이 넘어야 할 경쟁자로서 여길 뿐, 진정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다. 친구를 밟고서라도 1등을 하면 이 사회는 박수갈채를 받고, 부모의 칭찬도 한 번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정 없는 인간으로써 성장해 간다.

간혹 자신이 진정 원하는 꿈이 무엇인지 깨달은 행운아도 있지만, 관철시키기까지 쉽지 않다.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에게 있어 그저 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길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고진 매질을 한다. 그리고 이 정부마저도 그런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는 교육과정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계획된 기회주의 교육에 점점 길들여져 결국에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1등만 하겠다는 각오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어 버렸다. 그런 노력에도 1등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급기야 스스로 몸을 내던지고 있다. 이 사회가 1등을 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대학진학을 위해 또다시 벽에 부딪히고, 사회에 나와서는 취업의 높은 벽에 또 맞닥트린다. 그 어려운 것을 뚫고 나가도 삶의 만족도는 높지 않다. 자신이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뒤늦게 자신의 꿈을 찾으려 애쓰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또다시 강요한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계속해서 대물림되고, 이 사회는 감정이 메마른 ‘알파고’와 같은 인간만을 계속해서 만들어 낸다. 기회주의 교육이 철저하게 아이들의 소중한 꿈을 빼앗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나

이처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처지가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높은 사람들에게 따져 물어야 할까. 아니면 그저 추세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까. 혹은 아이들을 스스로 꿈꾸지 못하게 만든 부모들에게 책임을 전가할까. 우선 간단하게 말하면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1등만을 강요하는 교육이 문제며, 자신의 꿈을 대신 꾸게 만든 부모도 문제다. 아이들을 아이답게 대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가 바로 아이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책임이 없을까 되묻고 싶다. 한국교회도 분명 큰 책임이 뒤따른다. 이 사회가 아이들을 매정하게 내몰 때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문제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했던 주체가 바로 한국교회임에도 그렇지 못했다.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한국교회마저 아이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말았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고 하신 말씀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사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태부족하다. 이는 앞서 각종 아동학대 사건에 있어서 어린 생명을 지켜내지 못했다. 십자가탑이 그렇게 많은데 고통에 처한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보호자 역할도 내팽개쳤다.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고, 그들이 뛰어놀 공간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훗날 교회의 재정을 흘러넘치게 만들 자원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그 많은 십자가탑이 무색할 정도로 현실적인 교회부흥과 성장에만 목을 매 아이들을 차디찬 주검으로 만들고 있다. 어린이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하고 존중한 대상인 것처럼 대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 사회 안에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 돌보는 문화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단초를 놓아야 함에도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 그저 외형적 성장의 카타르시스에만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입으로는 사랑의 종교라고 떠들고 있지만, 사랑의 정의조차 모르는 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연약한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큰 주범인 셈이다.

한국교회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당장 주일학교가 줄어드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장차 한국사회는 물론,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양육하는 소중한 곳임에도 주일학교를 쉽게 없애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결국 눈앞에 이익을 위해서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행동이 한국교회의 미래까지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아이들보다는, 교회의 재정을 넘치게 만들어줄 나이가 지긋이 많은 장로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만 행동한다. 당장 헌금이 나올 곳이기에 잘 보이려고 충성을 한다. 안타깝지만 사회에서 소외당한 아이들은 교회에서조차 소외당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는 그저 어른들의 신앙심을 가슴에 새기라는 명령뿐이다. 이것저것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사회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아이들은 교회에서 정해놓은 천편일률적인 계획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마이너스 성장에 처한 한국교회에 그저 그런 성도로 성장한다.

다시 달리자

분명한 것은 사회가 됐든, 교회가 됐든 아이들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작금의 사회나 교회는 아이들을 누구보다 존귀하게 대해 이 나라의 일꾼으로 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따로 있음을 깨달아 단순히 1등만을 강요하는 기회주의 교육에서 탈피하고, 서로 화합과 일치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단지 자신들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빨리 인지해야 한다. 더불어 그들이 스스로 꿈을 갖고 그것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이정표 역할을 해야 한다. 든든한 조언자로서, 든든한 후원자로서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때로는 친구로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들어주며, 아이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아이들의 가장 확실한 버팀목이 되어 그들의 꿈을 응원해야 한다. 단지 성장을 위한 목회가 아닌,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목회로 전환해야 한다. 어린이주일과 어린이날을 맞아 다시 한 번 아이들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