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탁 기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리고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그런데 어버이날이 마냥 반갑지 않은 가정이 있다.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자가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가정의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을 갖는다. 스스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나선 모습은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고 아름답다.

아이를 낳아 버리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정한 엄마가 아닌,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깨달은 대한민국의 엄마들이다. 이들도 분명 우리 아이들의 엄마이며, 누군가의 사랑스런 딸이다. 그리고 사랑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엄마는 위대하고, 생명을 이어가는 ‘태’라고 한다. 때문에 이 땅의 모든 엄마를 생명이며, 사랑이고, 평화이며, 행복을 가져다가 주는 존재라고 부른다. 이들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시 한편이 떠오른다. 이 시를 읽고 미혼모 엄마들의 자랑스러운 얼굴을 그려 보았다. 자신을 낳아 준 엄마가 그랬듯이, 이들의 아이들도 엄마를 그리워하며, 언제인가 이 시에 나타난 마음으로 엄마를 그리워 할 것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코를 골고/아이들은 쌔근쌔근/잠으로 빠져들지만//어머니는 졸린 눈 비비며/바느질에 길쌈까지//아침을 재촉하는/새벽닭이 홰를 치기도 전에//어머니는 그보다도 먼저 일어나/아침을 맞이합니다.//몇 뙈기 안 되는 자갈밭/잡초는 무심하게 무성하고/어머니 호미 닳고 닳도록/적삼 젖는 줄 모릅니다.//…(중략)…//자식이라는 삭풍을 끌어안은 어머니/자식의 부름을 기다려주지 못한 어머니/흘러가는 세월 속에 그 미소 그립습니다”

5월 가정의 이 시 한편은 더욱 내 마음을 또 한 번 뭉클하게 만든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 이름 엄마. 그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 엄마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형제들이 있다. 그리고 내 자녀들이 있고, 손자손녀가 있다. 때문에 엄마는 생명을 이어주고, 가족의 평화를 준 아주 고마운 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엄마의 ‘태’는 생명의 존재가 된 이후 가장 편안한 곳이었으며,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때문에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랑스럽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또 어머니의 젖가슴은 말 그대로 생명을 이어주는 생명의 젖줄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젖을 빨며, 생명을 보존했고, 장성한 오늘 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창조적 선물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생각하면, 어릴 적 좋은 일들만 생각난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든지, 아니면 젖을 물고 단잠에 들었다. 또 기차 안이나, 버스 안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심지어 아기들은 엄마의 젖이 아니더라도, 할머니의 젖을 만지거나, 젖을 물고 단잠에 들었다.

당시 이러한 모습에 대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게 생각했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사랑과 평화를 그대로 느꼈던 것이다. 미혼모의 아이들도 그렇게 단잠을 이룬다. 아이를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키우는 모습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은 창피한 것도 몰랐고,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아무 곳에서나 생명의 젖을 공급해 주었다. 때문에 우리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태’를 생명이라고 부른다. 또 평화이며, 행복이라고도 부른다. 이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화목한 가족공동체를 이루며, 행복을 노래한다. 그리고 가업을 이어간다.

이제 이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다. 서글프다. 대신 그 자리를 우리가 하고 있다.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하고,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어도 그럴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형제들이 모이는 자리도 크게 줄었다. 가족의 구심점이 없어졌다.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잘 모시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협 증경회장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