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 등 모든 종교는 생명을 말한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생명에 대해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꽃이 시들어 지고 낙엽이 떨어지고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시체를 앞에 놓고 바라보며,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또 죽음의 문제로 고민해 왔다.

인간의 존재는 한마디로 왜소하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짧은지 알고 있다. 몇십억년이라는 우주적 시간에 비하면 사람의 생명은 한 순간이며, 찰라이다.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빛깔에 눈이 어두워, 틀에 박힌 기계문명에 얽매여, 그저 눈앞에 주어진 것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사람이다. 예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영원한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직답을 하는 대신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되물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람하며, 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율법교사가 대답한 것이다. 이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옳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율법교사의 태도는 옳지 않았다. 그것은 자세에 문제가 있었고, 예수님과 토론할 목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율법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율법지식을 과시하려고도 했다. 한마디로 예수님으로부터 진지하고 겸허하게 들으려는 자세가 없었다. 오만한 자세이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자기중심적 자세였다.

여기에서는 토론을 통해서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자신을 과시하거나, 옳게 보이려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어린아이 같이 마음을 열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율법교사의 자기중심적 자세는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 반대였다.

하나님 사랑의 계명에서는 나의 중심이 하나님에게로 옮겨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향해 있다. 위에 인용된 성결구절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 말은 나를 활짝 열고,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옮겨 놓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도 마찬가지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도 나 자신을 개방하고 나의 중심을 이웃에게 두라는 말이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하듯이 내 이웃이 마치 나인 듯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계명과 이웃사랑계명은 나의 중심을 옮겨놓는 행위이다. 사랑의 중심이 나에게만 있을 때는, 사랑을 못 할 뿐 만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린아이는 마음을 통째로 주고받는다. 어린아이는 어른들과 달리 속과 겉이 다르지 않다. 어린아이에게는 위선이 없다. 위선자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한다. 위선자는 폐쇄적이어서 사랑할 수도, 사랑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은 자기 안에 중심을 두고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고 이웃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이 자기자신 안에만 중심을 두고 살면,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 때, 인간은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행함의 종교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나,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앎(지식)와 행함(실천)이 단절된 것을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이다. 이를 극복하고 인간이 사마리아인 같이 실제로 행함으로써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 .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