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말하자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지 66년, 분단 71년 되었다. 이제 남과 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한국교회 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북한 아니 200여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요구이며, 염원이기 때문이다. 평화적인 민족통일은 우리민족에게 있어 양보할 수 없는 소원이며 염원이다. 그만큼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절실하고, 한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통일논의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분단의 중심에 세계교회가 있었는데, 세계교회가 세계분단을 극복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민족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와 권위주의, 권력지향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반통일적인 모습을 과거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일이 되었을 경우,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가던 길을 멈추고, 민족의 영원인 평화통일을 향한 행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한국교회는 과거 지배 이데올로기와 권력지향적인 편협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법, 이슬람 확산 반대 등에 함몰돼, 한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에게 배신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한국교회가 변화되지 않고서는 잃어버린 선교의 경쟁력을 회복할 수 없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이제 한국교회도 민족의 열망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분단을 이용해서 자신의 교회를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한민족의 통일염원을 배신하는 반민족적인 행위이다. 한국교회는 영미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분단 상황을 고착화 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지배이데올로기 신학과 신민지 신학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영미 지배자의 분단이데올로기와 식민지신학이 복음의 진리인양 착각 속에 있다. 성경 속에 담겨진 참된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지배이데올로기적인 복음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실패이다. 여기에서 실패의 규정은 복음의 본질로부터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실패한 영미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신학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새롭게 하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요구인 통일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에 익숙해진 나머지 기독교가 화해의 종교, 평화의 종교, 사랑의 종교, 생명의 종교, 희망의 종교라는 사실을 잃어 버렸다는데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분단극복과 민족통일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통일 이후 북한선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교인들로부터 헌금만을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의 한민족선교가 아닌 미래 통일이후, 북한에 남한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이식시켔다는 의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선교는 통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우스운 것은 북한선교를 말하는 선교사들 중, 단동이나, 순선 등 북한과 인접한 곳에서 북한 땅을 향해 성경책을 비닐봉사에 싸서 던지고, 선교했다고 말하는 선교사들도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 밖에 있는 통일문제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에 대해 한민족의 하나 됨을 바라는 통일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반통일적이며, 반민족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또 비인간화를 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분단은 여러 가지 모순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그 분단모순을 극복하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남북한의 선교, 아니 한민족의 선교는 남한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민족 전체의 맥락에서 남북한 기독교인들이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 종말적인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역사 내에서의 분단된 세계 양편을 초월하며,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통일)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박순경 박사는 “북한선교라는 말은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선교를 암시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의 오류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반성을 말해주지 않는다. 북한선교라는 말은 마치 북한만이 선교를 필요로 하는 피선교지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므로 통일을 위한 한민족선교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 선교는 한민족 전체의 선교이다”고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1986년, 한길사)에서 밝혔다.

박 교수가 말하는 한민족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인 만큼, 한민족전체가 그의 복음을 새롭게 들어야 한다. 또 북한이 피선교지라면 남한도 피선교지이며, 하나님의 선교에 상응하는 한민족 스스로의 선교이어야 한다. 그렇다. 북한의 무신론은 극복되어야 한다. 또한 남한 물신상인 우상도 극복되어야 한다”면서, “북한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복음의 초월성을 남북한 기독교인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남한도 뿌리깊게 박혀 우상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정신과 문화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의 말대로 서로 갈림의 상태에서는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서로 으르렁 거리는 맞선 대치상태의 싸움마당에서 우리민족은 잘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국민 모두는 공감한다. 한마디로 남과 북의 대치상태에서 북한동포들이 사람답게 살지를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사람답게 살수 없게 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교회지도자들은 분단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분단을 고착화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기독교계의 분단이데올로기는 해방 이전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통일문제와 민족문제의 관심 밖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민족의 요구이며, 염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응답해야 한다.

한민족의 요구에 응답하는 교회되자

송기득 교수는 자신의 저서 <끝내 사람이고자>(1990년, 큰밭 기독교 학술연구회)에서 “통일의 당위성은 비단 한겨레가 하나가 되어, 함께 살자는 민족통일 염원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남쪽과 북쪽의 갈라짐이 오는 여러 가지 모순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그 분단모순을 극복하자는데 그 뜻이 있다”면서, “남쪽과 북쪽이 갈라진 상태에서 잘 살수 있다면, 굳이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할 까닭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 갈림으로 해서 우리 겨레가 안팎으로 잘 살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남과 북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남과 북의 분단 상태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송 교수는 이것을 비인간화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분단의 모순이라고 했다. 이 것은 결국 자진자와 못가진자, 있는 자와 없는 자, 힘있는 자와 없는자 간의 계층갈등을 일으키고, 남과 북이 갈라진데서 계급모순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과 북이 하나될 때, 분단모순도, 계급모순도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는 아직도 통일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며,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통일문제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북한의 무신론과 통일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조차도 곱지 않은 시선이다. 일부 교단과 교회는 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목회자 및 평신도들을 극심한 매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심지어 ‘빨갱이 목사’로 매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닌 화해의 참뜻을 망각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한민족이 요구하는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화해의 참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한민족의 요구인 민족통일의 문제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오늘의 상황에서 감당해야 할 선교적 과제를 저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역사현장을 회피하는 것이며,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교회도 민족공동체로서의 신앙공동체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한민족의 한사람이다. 우리는 한민족의 한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나, 교회나, 신학자들은 민족공동체 일원으로서 남북한의 화해와 하나 됨을 위한 민족통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남북한 민족분단 극복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실현한 인간구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평화’, 샬롬을 노래해야 한다. 하나님의 평화는 역사적 현존이며,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평화이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무력적 통치 아래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종속관계에서 유지된 평화, ‘팍스’가 아니다. 팍스는 권력이 만들어낸 평화이다. 한마디로 신민지 민족들의 정의를 짓밟으면서 만들어낸 거짓평화이다. 화해와 정의가 실현된 상태의 평화가 참평화이다.

팍스(?) 샬롬(?)

한민족의 통일은 샬롬이 팍스를 뚫고 들어가 변혁시켜야 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며,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통일은 쌍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위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7.4공동성명에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평화협정, 군비축소, 반전반핵 등으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현존인 정의와 평화의 세계는 우리의 역사 현장에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곧 정의와 평화의 실현이 통일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은 알아야 한다.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위에 이루려는 하나님나라의 실천이라는 것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의 연합단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지금의 선교형태 모습으로는 기독교 선교의 경쟁력을 담보해 낼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세계교회가 세계분단을 극복한 만큼, 한국교회의 연합단체도 분단극복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한 민족분단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한마디로 한민족의 요구(통일)에 응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요구에 응답하지 아는 것은, 아니 방관하는 것은, 교회연합을 구축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나라 정의와 평화의 복음에 불순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바벨탑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교회연합이 민족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분명,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민족공동체 갱신, 민족통일의 과제로서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이며, 복음의 요청이며, 선교의 요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복종이다. 이것만이 한국교회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사랑과 정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통일된 한민족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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