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은 아가페 사랑에 의해 형성

오늘 산업사회에서는 가치가 있고 유용한 사람이 아니면 낙오되고 버림을 받는다. 한마디로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질과 능률을 숭상하는 복잡한 산업문명 속에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던 예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능력만을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소중함을 잃게 된다. 한 인간이 쓸모 있으면, 그 인간이야 아무래도 좋고, 얼마든지 다른 인간으로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사회적 원칙이 오늘 개인 관계까지 지배하기 시작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모순이 오늘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사회는 필요에 따라 남편이 아내를 바꾸고, 필요에 따라 아내가 남편을 바꾸는 세태가 되었다. 이혼율이 급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혼으로 인해 일어나는 파장은 너무나 크다. 그렇다고 목회자와 교인들의 가정이 건강하냐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능력과 소유를 추구할 때, 인간은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성이 없는 삶은 진실이 결여되고, 기쁨도, 사랑도, 눈물도, 용서도 없다. 인간의 진정한 주체성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자유롭고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삶에 기쁨과 보람을 가져다가 준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며, 세상을 삭막하게 만든다.

박재순 박사는 자신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에서 “조건 있는 사랑과 타산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자유와 기쁨은커녕, 환멸과 갈증을 일으킨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을 물질에 예속시켜 버린다. 또한 고인 물처럼 인간의 마음속에서 썩는다. 또 타산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갈증을 더해주고, 삶을 이기적이고 빈곤하게 만든다”고 조건 있는 사랑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박 박사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사랑은 나와 너와 그의 가슴을 통해서 흐르고 흘러 모든 인간을 자유와 평등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서 이 같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찾아 볼 수 있느냐(?)는데 모두가 의아해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사회와 민족을 향한 사랑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최근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과 함께 어려워진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쓰던 재정을 축소하거나, 없애 버렸다. 또한 제3세계 국가를 향한 선교헌금도 축소하거나, 중단해 버렸다. 잃은 양 한 마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행동하는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너희 중에 누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 하늘에서 회개 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 할 것이다”(누가복음 15장 1-7절)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여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원망하자, 답변으로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또한 천국에 가려거든 가진 재산을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 줄 때 가능하다고 했다.

이 성경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어울린 무리들은 사회 체제로부터 배척받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농민, 어민, 날품팔이, 병신, 병든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다. 여기에는 조건 없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그들 가운데는 세리와 창녀들도 있었다. 위선적인 바리새파나, 서기관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비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죄인인 세리와 창녀와 자유롭게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잃은 양 하나의 중요성

아가페 사랑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잠든 영혼을 깨운다고 했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을 영혼의 열쇠라고도 말한다. 사랑은 누구나 갈망하고 사모한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완전한 합일에의 근원적인 사랑의 갈망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텔레비전의 연속극과 유행가의 주제는 한 결 같이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다.

사랑은 크게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이 있다. 에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것이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대상에의 갈망이다. 지금 내가 갈망하는 것, 내가 필요로 하는 것,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이며, 고결하고 빼어난 인간을 노래한다.

아가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아가페 사랑은 나의 욕구와 갈망과는 관계가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관계없이 무조건 절대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예수가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몸소 가르치고, 실천으로 옮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악하고, 추하고, 병들고, 떠돌이, 세리와 창녀, 병신 등 못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이 사랑은 소외되고 버림받고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현대교회에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다수를 위해 소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 교인과 목회자들의 사고이다.

그럼에도 오늘 많은 교회들은 공동체인 교회 앞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용하고 있다.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행동하는 교회, 행동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몰각한 것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한다. 가난한 농민, 어민, 날품팔이, 병신, 병든 자,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치라고…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그것은 북한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일인 독재와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북한동포들을 어떻게 가슴에 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 응답해야 하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북한선교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북한선교란 이름 아래 교인들로부터 선교헌금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한국교회의 북한선교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기보다는, 통일 이후 북한선교에 대비하겠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교파주의와 분열주의를 그대로 북한에 이식시키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지배이데올로기의 신학, 식민지신학, 교파주의가 한국교회 선교에 있어 얼마나 시행착오를 일으켰는가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일인독재 아래서 신음하는 북한동포들의 요구에 한국교회가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한민족의 염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에 답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조건 없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며, 한민족의 한복판에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선교적 과제이며, 하나님나라운동이다.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을 강요

한민족의 아픔을 떠난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북한동포들을 무조건 적대시 해 왔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남북한의 민족분단을 최대한 이용해 왔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적 갈등은 물론, 노사 간의 갈등, 이념적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데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부자들을 위한 종교로 변질되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종교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과거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날품팔이, 병신, 농민, 피압박민족을 사랑하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다. 당시에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잊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농민, 병신, 병든 자, 고난당하는 이웃을 멀리하면서,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인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한마리가 아흔아홉 마리 보다 크고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공자의 말대로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는 원리는 정치와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의 기본 원칙이다. 그것은 다수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역사는 소수를 위해 다수를 억압하고 수탈했다. 다윗이 그랬고, 예루살렘 성전주의자들이 그랬다. 그것은 또 우리의 역사 속에서 계속 그래 왔다. 또한 오늘 모든 사회도, 교회도 이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모든 국가의 법은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다수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는 소수를 교도소로 보내야 하는 현실, 다수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소수의 자유를 박탈하는 장치가 법이다. 그런데 잃은 양의 비유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적은 사람이라도 소외된다면, 남은 사람들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늘 중동의 IS를 피해 다수의 국민들이 보다 낳은 삶을 위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등의 원칙이 없는 오늘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 한국교회도 소수를 위해 다수의 교인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제왕적인 교회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아흔아홉을 지키기 위해 하나를 버릴 수 없다. 잃어버린 하나를 그대로 둔다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결국 잃어버린 하나를 그대로 버린다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도 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를 지키는 것은, 아흔아홉을 지키는 것이며, 전체를 살리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과연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아 얼마나 헤매고 있는가(?) 예수님을 성서를 통해 묻고 있다.

복음, 아가페에 관한 기쁜 소식

복음은 예수가 실현한 하나님의 아가페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주인으로 삼는 나라, 하나님의 아가페가 지배하는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은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등의 아가페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갈등, 그리고 소유욕이 지배하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복음의 사랑이 법을 대신 할 수 없다. 또 법이 인간에게 자유와 사랑의 기쁨, 삶의 주체성을 가져다가 줄 수 없다. 법은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그 자체를 절대화함으로써 사람들을 그 체제에 예속시켜 버린다. 그래서 법은 아가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럼에도 신학자도, 목회자도, 교인도, 이를 실행에 옮기지를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법은 그 자체를 위해서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가페, 하나님의 나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평등이 넘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잃은 양의 비유는 전혀 다른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아흔아홉 마리로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 한 마리를 찾았을 때, 다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해야 한다. 소외된 인간 하나를 찾아 만나는 기쁨은 소외되지 않은 인간 아흔아홉으로부터 얻는 기쁨보다 크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것은 정치적 사고나, 법적인 사고로 생각할 수 없다.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아가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