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영국의 산업혁명 이래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자본과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어 인간은 소외 또는 추방당하는 일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시대였다.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고, 자본가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자본과 결탁된 ‘세상 나라’는 그 자본가의 협조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두 나라설’의 충실한 수호자로서 문제의 본질을 느끼지 못하고, 옛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했다. 오히려 자선운동으로 공장 안에서 착취당하고, 거리로 쫓겨나서 분노의 화신이 되어가는 소외군을 무마하는 일에 앞장섰다. 한마디로 의식•무의식적으로 자본가들의 시녀노릇을 한 것으로 자기를 정당화 했다.

이러한 판국이 극에 이른 19세기 말경부터 ‘두 나라설’에 도취되어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잠에서 깨어 제2종교개혁운동 벌였다. 영국에서는 모리스와 깅슬러, 커들로 등이 교회와 사회 사이에 높은 담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를 했다.

미국에서는 로센부시가 개인구원이라는 종교와 이기적인 도피처에서 그리스도인을 끌어내기 위해 ‘사회복음’을 제창,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있음을 강하게 제기했다. 독일에서는 브롬하르트 부자가 부흥사적 대중 집회를 시작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선교무대는 결코 교회로 한정시킬 수 없었다. 선교무대가 세상전체라는 것을 주장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하나님의 선교’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신학적 기초는 “예수는 세상 모든 세력을 정복한 승리자”라는 것이었고, 그런 전제 아래 정치, 경제, 사회 체제 안의 모든 악에 대해서도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는 내적이거나, 피안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부활의 예수님 역시 피안으로 간 것이 아니다. 바로 사회 안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 안에서 승리를 보고,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셔서 가진 것이 없는 사람과 소외된 사람, 그리고 모자라는 사람, 병든자, 과부, 떠돌이들 속에서 역사하시고, 이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향해 진격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로마의 권력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스위스의 쿠테르와 라카츠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모순에 대해서 냉혹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종교라는 탈을 씌워 인위적으로 성역에 가두어둠으로써 결국 사회는 무신 세계화되고, 맘몬이 판을 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보고, 비판했다. 또한 교회의 ‘하나님 독점화’로 생겨난 문제점도 공격했다.
쿠테르는 자신이 쓴 <당신의 의무>라는 글에서, “맘모니즘에 근거한 제한 없는 탐욕을 원리로 하고 거짓을 근본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고 진단하고, 결론으로 “하나님은 종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종교가 아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보잘 것 없는 떠돌이, 병신, 병든자, 과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과 함께 자신의 나라를 만드셨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비역사화시키고, 종교적 이기주의로 만들어버린 잘못에 대해서 연대적 책임의식을 갖고, 자기 성을 구축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교회에 또 한번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인 자기개혁을 재촉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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