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영원한 열쇠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과연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있는가(?) 아니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있는가(?) 그리고 행동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좌절하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이스라엘 민족은 1천년 동안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기다리며, 몸부림 쳤다. 한마디로 새로운 나라를 대망하며 기다렸다.

이 땅에서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나라(하나님나라)를 성취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인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역사의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생명의 종교’, ‘고난의 종교’, ‘부활의 종교’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은 나의 욕구나, 갈망과는 관계가 없다.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가페 사랑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신약성서 전체의 흐름이 바로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약하고 추한사람, 병들고 못난 사람,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맘몬과 바벨, 그리고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에서 이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 교육부의 교육정책관이 말했듯이 오늘 한국교회는 오늘 산업사회에서 유용한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로 변질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변질되었다. 한마디로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신, 떠돌이, 농민,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교회와 유리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교회는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히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선교초기 수명을 다해가는 조선의 봉건체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인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려고 했던 당시의 복음이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왕조에 희망을 걸기 어려운 시기에 들어온 기독교는 남녀평등과 사민평등을 앞세워 이 땅에 들어 왔다. 타락하고 쇠퇴한 이조 말엽의 기독교가 표방한 이념은 한마디로 희망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조 봉건체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회로 몰려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미선교사들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시키면서도, 의료사업, 구제사업, 교육사업 등 사랑의 선교를 펼쳤다.

이런 교회들이 변질돼 맘몬과 바벨, 다윗성 쌓기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 교회는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해버렸다. ‘사업을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교인들의 입에서 쉽게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곧 인간성 상실이라는 결과를 불러 왔고, 인간의 주체성마저도 상실하게 했다. 주체성 없는 삶은 진실이 없다. 진실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교인 간에 사기를 치는 일들이 빈번해지고, 교회당은 장사꾼들로 가득 차 악마의 금전인 ‘돈의 소리’만 들리고 있다. 그리고 ‘돈’을 가진 자만이 ‘축복’을 받은 것처럼 오도되고 있다. 한마디로 ‘돈’이 ‘신’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 떠돌이, 병신, 노동자, 농민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1990년도를 정점으로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과거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인 가난한 사람, 좌절한 사람, 병신, 노동자, 농민들 속에서, 이들과 함께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하라

인간의 주체성은 아가페사랑에 의해서 형성된다. 인간은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만 자유롭다. 사랑은 삶을 삶답게 만들어 주고, 기쁨과 보람을 준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은 삶이며, 기쁨은 물론, 환멸을 주고, 갈증을 일으킨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다. 교인들이 없어 갈증을 일으키고, 목회에 대한 보람도, 기쁨도 없다.

결국 사랑 없는 사람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예속시킨다. 고인 물처럼 인간의 가슴 속에서 썩고 있다. 그러나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회자의 사랑, 교인들의 사랑은 나와 너와 그의 가슴을 통해서 흐르고 흘러 모든 인간을 자유와 평등의 바다로 인도 한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바리세인들로부터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사랑을 베풀었다. 오늘 국교회의 지도자와 교인들은 강도만난 사람들을 보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바리새파사람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을 모범적인 이웃으로 선정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도전적이었으며, 충격적이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한마디로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나 혼자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은 삭막해지고, 살벌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다.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생각하지 않고, 내 교회, 내 교단만 생각한 결과, 교인쟁탈전이 벌어지고, 교권을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지 않는가(?)

그리스도교는 너의 교회와 나의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는 이 땅에는 6만 여개의 크고 작은 교회들이 설립되어 있다. 교파도 다르다. 신학과 신앙도 다르다. 교회의 특성도 다르다. 나의 교회와 너의 교회를 위해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제3의 교회들은 희생을 당한다는 것이다. 또 너와 나를 위해서 눈에 보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제3자가 얼마나 희생되고 있는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길은 나와 너와 그를 죽음에로 이끄는 길이다. 나만 살려고 나를 중심으로 해서 살 때,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보습을 보라. 내교회만 살려고 한 나머지, 전국 6만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의 중심을 이웃과 함께 나눌 때, 이 세상은 생명에의 길로 이끌리며, 생명이 지배하게 된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삶으로써 , 그리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가르쳐 주었다. 예수님은 남을 위한 존재가 됨으로써 친히 생명이 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삶을 열고, 가정을 개방해서 상처받은 사람을 맞이해야 한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분명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위선자적인 종교인이 아닌가 묻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 교회당은 있는가? 하늘에만 있는가? 청와대와 국회 의사당에 있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형제들 속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아니 교인들이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무게의 중심을 자신에게 둔 결과의 비난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무게의 중심을 자신에 둔 결과 침몰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무게의 중심을 내 교회에 두면서,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

복음은 예수가 실현한 하나님의 아가페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가난하고 무시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을 주인으로 삼는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가페가 지배하는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은 아가페사랑이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물렀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7절과 28절에서 두 번이나 ‘이같이 행하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않았다. 행위로 연결시켰다. 죽어버린 믿음, 교리적으로 굳어져서 생명력을 상실한 믿음, 지식만의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다. “이같이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답변은 유대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교리주의자, 고식적인 신자에게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음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산 믿음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잇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사랑을 행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살 수 있는 행위는 조건 없는, 계산하지 않은 사랑의 행위이다.

조건을 붙인 사랑, 돌려받을 것을 계산한 사랑은 오염된 물이 질병과 죽음을 초래하듯이 인간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계산하지 않은 사랑은 맑은 샘물과 같아서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며 생명을 풍부하게 해 준다. 사마리아인의 행동하는 사랑은 보상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한 믿음에 있지도 않았다. 오직 행위에 있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행동해야 한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모든 인간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가족, 친구, 교인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고통당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들 속에서 활동하고, 이들에게 사랑의 선교를 펼쳤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을 돕지 않고,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기독교인의 자유는커녕,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 외침에 귀를 막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없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이기적인 사람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의 소리 없는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청소부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 공사장 인부들의 신음, 농민들의 아픈 소리, 노숙자들의 울부짖음, 아프리카와 중동지방에서 보다 낳은 삶을 위해 유리방황하는 난민, 종교 간의 갈등과 전쟁으로 인해 신음하는 세계민족의 아픈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향해 행동하는 교회, 사랑으로 실천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국교회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