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신문
해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종교개혁 499주년에 붙이는 제언(1)…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자
유달상 기자  |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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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04  14: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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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이탈된 교회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99주년이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향한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변화와 개혁의 바람도 불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500년전 타락한 중세교회와 닮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마다 오늘의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망각했다. 중세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에 대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목회자와 교인들은 인지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타락한 중세교회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를 향해, 교회가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의 신용과 기대는 갈수록 크게 떨어지고 있다. 겉은 요란한데 속은 비어 있다. 가톨릭교회는 교인 수가 100만명에서 700만명으로 늘어났는데, 개신교의 교인은 1000만명에서 5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분명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 대신 한국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한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결정 짓고 있다. 또 ‘헌금의 액수’를 ‘믿음의 척도’라고 아무렇지 않게 외친다. 곧 한국교회는 ‘돈’이 ‘신’이 되어버렸다. 여기에다 교회들이 부자가 된 나머지, 부자교인들의 입맛에 맞게 설교하며, 이들을 위로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들의 정서에 맞게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교회당 내부를 호화롭게 장식한다.

양적으로 비대해진 교회, 권력과 밀착된 교회, 부자가 된 교회들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 의문은 교회가 그만큼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이탈되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웃, 이웃에 의해 죽임당한 자들, 떠돌이, 삶의 현장에서 쫓겨나 고난당하는 사람들, 각종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 통일을 갈망하는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해서 아랑곳 하지 않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고, 사채놀이 하고, 다단계 사업을 하는 교회까지 등장했다. 여기에다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의 윤리적 타락은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위상을 크게 실추시키고 있는 것은 물론,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

이러한 잘못은 교회가 무엇이며, 본래적인 자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학교 교육마저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신학교육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영미의 식민지신학과 지배이데올로기 신학을 지켜내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추상적인 하나님나라만을 외치고 있다. 대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제국의 다윗성을 쌓기에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 권력과 결탁된 교회는 더 이상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웃, 이웃에 의해 죽임당한 자들, 떠돌이, 삶의 현장에서 쫓겨난 고난당하는 사람들, 각종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 통일을 갈망하는 이산가족들이 찾지를 않는다. 분명 한국교회는 이들 속에서 성장했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들을 버리면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며, 교회마다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작은교회의 교인들을 빼앗는 등 교인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다”

이것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목회자들 역시 설교 때마다 부르짖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동떨어져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렸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가 의로운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성격이 다르고, 생김새가 서로 다르고, 지위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째 원칙이며, 교회의 첫째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와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끼리끼리 사귀는 원칙과 유유상종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부자는 부자끼리 ,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끼리, 노예는 노예끼리 살아가는 것이 사회생활의 원칙이다. 이것은 현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부자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성서는 다른 것을 가르친다.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진다. 성서는 거룩한 하나님과 추한 죄인의 만남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한다. 서로 다른 이들과의 사귐이 신앙의 원칙이며, 지위와 신분을 넘어서서 친교를 나눌 수 있을 때 인간의 삶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오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학벌이나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사교집단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가난하고, 무식하고, 고난당하는 이웃, 떠돌이, 병신, 노숙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교회의 문턱은 점점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이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잃어버린 자와 소외된 자를 찾아 나섰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쁨이 넘쳐 잔치를 베푼다. 잃지 않은 99마리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계산은, 합리적인 계산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의 이런 어리석은 사랑에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한사람을 버릴 수 있는 단체나, 교회는 남은 99마리의 양도 버릴 수 있다. 한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공동체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공동체이다. 무능하고, 소외된 인간,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이웃을 얼마나 잘 돌보는가에 따라 그 교회와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을 안아준다는 것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와 교회는 버려진 인간들을 통해서 구원받고 완성된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은 이루어진다. 교회는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의 공동체

이런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언제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교회,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는 것처럼 기뻐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보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 자기들 가운데 안주하는 교회, 민족의 염원에 답하지 못하는 교회는 닫힌 교회이며,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이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않으셨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그렇다. 교회는 자신들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 장소로 변질되어 버렸다. 오늘 교회마다 목회자와 교인, 장로와 교인, 교인과 교인, 목회자를 둘러싼 다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 70%이상이 이를 경험했다. 심지어 사회법정으로 다툼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법정에서 잘잘못이 가려졌음에도, 다툼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라. 다툼으로 인해 연합단체가 분열되고,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고, 목회자의 잘못으로 인해 교회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 이런 사실 앞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특권을 누리기 위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자이다. 교회는 자기 욕심을 누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곳이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드리고, 몸까지 바치는 곳,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곳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사도 바울의 말이다. 초대교회는 이런 원칙을 지켰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살았다. 로마제국 시대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기 이전까지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었다. 고리대금을 일삼는 귀족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투쟁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회가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실천적 봉사와 노력이 교회의 선교에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공동체가 타락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권력과 결탁해서 부자교회가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 농민, 병신 등과 등을 지었다. 과거의 교회나, 현재의 교회는 이들과 함께 사귀고, 나누고, 함께 했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깨달아야 한다. 루터는 라틴어로 된 성서를 읽기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누구나 읽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성서를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례할 목사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오늘 교회의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교인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설교, 성례전, 성서교육을 책임지는 전문적 교역자이다.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아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 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원형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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