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생명의 존엄성 몰각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생명의 존엄성에서 이탈된 말들을 자주 듣게 된다. 문제는 생명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외쳐야 할 목회자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 뱉는데 큰 상처를 주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일부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예수님을 믿은 아이들은 괜찮은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아이들은 지옥에 갔을 텐데…”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내 뱉었다. 한기총의 한 인사는 “기차나, 버스타고 불국사로 여행을 갈 것이지,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세월호를 타고, 여행을 가다가 이 같은 사단을 일으켰냐”고 막말을 내뱉어 국민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이와 비슷한 말들이 요즘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중 하나가 “배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는데,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한 기독(민주)당이 세월호 희생자와 6·25 참전용사를 비교하며 ‘6·25참전용사들은 최고 10만원 약값 지원받고, 세월호 애들은 최고 대우받고, 나라를 위해 죽은 자가 거지취급 당하고 여행가다 죽은 자 황제 대우 받는다’는 내용의 플랜카드를 내 걸었다. 생명의 존엄성을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생각해야 할 기독인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닌 것 같다.

이 같은 내용들은 잃어버린 생명 하나를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벼랑 끝으로 내 몰렸는데,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니셨는데, 어떻게 참담하게 죽은 아이들을 향해 이 같은 말을 내 뱉을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한국교회 안에 종교적, 개인적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이른 한국교회는 목사가 자기부인을 죽여 암매장하고, 신학대학교수가 자식을 때려 숨지게 했는데도,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싸구려 복음을 전하며, 성령을 방매하고,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안에 존재하는 한,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희망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자기개혁은 고사하고, 낡은 철갑을 더욱 죄어 매고 있다. 여기에 염증을 느낀 의식 있는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 안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농민, 떠돌이,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대신 그 자리에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부자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이들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곧 ‘돈’이 ‘신’이 되어 버렸다. 교인들은 돈으로 하나님나라 티켓을 구입하는 결과를 연출하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나라의 척도, 구원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말한다. 이렇게 타락해 가는 한국교회도 중세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다. 누구도 한국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하비 콕스는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고 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이럼에도 한국교회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타락해 가고 있다.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희망 없는 교회에 철거민과 노동자, 농민, 떠돌이, 병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던 철거민과 노동자, 농민, 떠돌이, 병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지녀야 할 하나님의 공의와 인권, 그리고 평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약자와 소수를 대변하고, 차별과 분리를 거부하며, 가진 자와 배운 자, 그리고 자산가와 기득권의 반성과 사회적 환원과 정당한 역할을 강조해야 할 교회가 침묵하고 있다. 스스로 교회의 가치와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 없는 하나님 앞에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세례를 주며,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최소한도 겉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인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의 보수적인 일부 목사들은 자기성, 자기 확대를 구축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교회를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인 자기개혁의 길을 망각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최소한도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인 자기개혁과 교회개혁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개혁과 교회개혁을 망각한 교회의 모습 속에서 생각해서는 안 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교인 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말하기 쉽게 “이단단체가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문제의 단체로 지목한 이단단체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상처를 입은 교인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목사는 소송을 제기한 교인을 출교처분을 내린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A감리교회와 이천의 D장로교회, 강동의 M교회, 부천의 Y교회 등등이 바로 이들 교회이다. 이 같은 사건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단단체를 이용한 것으로, 목회자들에게 자기개혁을 강력히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천의 Y교회 목사는 자신의 혼외자식을 감추기 위해 이단단체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으며,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세상과 교회에 알려지면서, 혼외자식을 둔 목회자들의 면면이 들어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오히려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들이 나서서 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단체는 교권과 교리적으로 아니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가식적이든 아니든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도 이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며, 교인들과 소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내려놓자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았다. 영미교회들이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정치와 경제에 관심을 갖고 교회를 세속화시키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역시 권력과 밀착되어 많은 이권을 챙겼으며,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부르짖으면서 쇄락의 길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서양문화로 대변되는 기독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가 타락한 영미교회의 전철을 밟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당하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하셨다…(고린도전서 1장27-28절)”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의 체질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성경구절은 역사의 주인공이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벌였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영미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는 성서의 정신으로 돌아가 위치를 의식하고, 자기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동안 쌓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성서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년만에 1천만명이 넘는 교인을 만들었다.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였다. 이제 한국교회도 영미교회와 마찬가지로 200여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있다. 가진 자들의 기득권에 눌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신, 떠돌이, 노동자, 농민 등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향해 기득권을 내려놓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를 좌지우지 하며,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대다수의 교회는, 역대정권과 타협하며, 그 비호아래 성장했다. 이른바 ‘근대화’라는 바람에 휘말려 본향을 잃은 수많은 피난민, 이농인구들이 다급하게 찾아간 곳이 바로 교회이다. 이들은 교회성장의 주체였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저들에게 걷은 헌금을 가지고, 수십억, 아니 수백억, 수천억원짜리 교회당을 짓고 버스를 사들여 교인쟁탈전을 벌였다. 우스운 것은 이것이 응분의 권리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고, 안주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는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성장의 주체였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한국교회는 민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막았으며,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비호하며, 협력하는데 앞장섰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선교초기 모여들었던 피압박민족, 3.1만세운동 당시 총동원되어 외쳤던 그 과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뿌리인 예수님과 그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님만을 고수하던 이스라엘 신앙으로의 회귀의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무게의 중심을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 놓아야 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 모두가 기득권을 가진 주류에 저항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보수성은 주류에 가담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주류란 바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권력의식이다. 주류가 내세우는 교리는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얻은 권력이지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소위 오늘 한국교회가 정통을 운운하는 것은 주류에 충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을 살리는 종교로

주류는 정통성의 담지자로 자처하면서, 그 권리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군림했다. 그 밑에서 참진리는 침묵 당했으며, 많은 진실과 양심들에게 이단자라는 낙인찍었다. 그리고 처형했다. 처형권이 없는 교회는 다른 형태로 그대로 행했다. 예수님은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과 활동하셨고, 이들을 위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중세 로마교회는 성서를 차압하고, 진실을 차단했다. 루터는 저들에 의해 이단자로 추방됐다. 그러나 루터나, 스위스의 정권을 손에 넣은 칼빈 자신도 ‘성공’과 더불어 주류의식에 사로잡혀 이단자를 규탄하고, 처단하며,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의 절규를 저주했다. 한국교회 역시 방법과 정신이 어찌되었건, 승리자의 편에 서는 것을 진리 옹호의 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역사현장에 들어가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성취해야 한다.

또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미국도, 서구도, 팔레스티나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다. 그 사실을 재확인하고, 오염된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가 그리스를 거쳐 유럽과 미국에 들어와 그들의 표현대로 정착했듯이, 우리도 우리대로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현장에서 우리의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표현하면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더 이상 한국교회도 영미교회를 매개로 해서 예수님을 만날 이유가 없다. 우리의 감정을 저들의 문화와 가락으로 표현할 이유도 없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제국주의 신학과 신민지 신학,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적인 신학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살 수 있다.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민족을 살리는 종교가 될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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