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신문
해설
사회와 교회는 버려진 인간들을 통해서 구원받고 완성된다종교개혁 499주년 한국교회에 길을 묻다-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유달상 기자  |  yds12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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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2  09: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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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이탈된 교회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이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99년이 되었다. 500주년을 1년 앞두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향한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변화와 개혁의 바람도 불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500년전 타락한 중세교회를 닮아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마다 오늘의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망각했다.

중세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에 대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타락한 중세교회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교인들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를 향해, 교회가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신용도와 기대는 갈수록 크게 떨어지고 있다. 겉은 요란한데 속은 비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미천한 자, 과부, 고아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톨릭교회는 교인 수가 100만명에서 700만명으로 늘어났는데, 개신교의 교인은 1000만명에서 5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분명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결정짓고 있다. 또 ‘헌금의 액수’를 ‘믿음의 척도’라고 아무렇지 않게 외치고 있다. 곧 한국교회는 ‘돈’이 ‘신’이 되어버렸다. 여기에다 교회들이 부자가 된 나머지, 부자교인들의 입맛에 맞춰 설교하며, 이들을 위로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들의 정서에 맞게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교회당 내부도 호화롭게 장식한다.

양적으로 비대해진 교회, 권력과 밀착된 교회, 부자가 된 교회들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이다. 이 의문은 교회가 그만큼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이탈되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웃, 이웃에 의해 죽임당한 자들, 떠돌이, 삶의 현장에서 쫓겨나 고난당하는 사람들, 각종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 통일을 갈망하는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해서 아랑곳 하지 않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 교인들이 낸 헌금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고, 사채놀이 하고, 다단계 사업을 하는 교회까지 등장했다. 여기에다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의 윤리적 타락은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위상을 크게 실추시키고 있는 것은 물론, 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있다.

이러한 잘못은 교회가 무엇이며, 본래적인 자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학교 교육마저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신학교육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영미의 식민지신학과 지배이데올로기 신학을 지켜내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하고, 추상적인 하나님나라만을 외치고 있다. 대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제국의 다윗성을 쌓기에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 권력과 결탁된 교회는 더 이상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웃, 이웃에 의해 죽임당한 자들, 떠돌이, 삶의 현장에서 쫓겨난 고난당하는 사람들, 각종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 통일을 갈망하는 이산가족들이 찾지를 않는다.

분명 한국교회는 과거 이들 속에서 성장했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들을 버리면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며, 교회마다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작은교회의 교인들을 빼앗는 등 교인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

헌신한 이들의 사랑공동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다”

이것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목회자들 역시 설교 때마다 부르짖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동떨어져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족의 한, 국민의 한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렸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가 의로운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성격이 다르고, 생김새가 서로 다르고, 지위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귀고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째 원칙이며, 교회의 첫째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와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끼리끼리 사귀는 원칙과 유유상종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부자는 부자끼리 ,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끼리, 노예는 노예끼리 살아가는 것이 사회생활의 원칙이다. 이것은 현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부자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부자들의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성서는 다른 것을 가르친다.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진다. 성서는 거룩한 하나님과 추한 죄인의 만남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한다. 서로 다른 이들과의 사귐이 신앙의 원칙이며, 지위와 신분을 넘어서서 친교를 나눌 수 있을 때, 인간의 삶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오늘 교회는 어떠한 모습인가. 학벌이나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사교집단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가난하고, 무식하고, 고난당하는 이웃, 떠돌이, 병신, 노숙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교회의 문턱은 점점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이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잃어버린 자와 소외된 자를 찾아 나섰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쁨이 넘쳐 잔치를 베푼다. 잃어버리지 않은 99마리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계산은, 합리적인 계산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의 이런 어리석은 사랑에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한사람을 버릴 수 있는 단체나, 교회는 남은 99마리의 양도 버릴 수 있다. 한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공동체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공동체이다. 무능하고, 소외된 인간,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이웃을 얼마나 잘 돌보는가에 따라 그 교회와 사회의 성숙도를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을 안아준다는 것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와 교회는 버려진 인간들을 통해서 구원받고 완성된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은 이루어진다. 교회는 잃은 자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

이런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언제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교회,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는 것처럼 기뻐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보자.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교회, 자기들 가운데 안주하는 교회, 민족의 염원에 답하지 못하는 교회는 닫힌 교회이며,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이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그렇다. 교회는 자신들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주장과 관심을 관철시키는 장소로 변질되어 버렸다. 오늘 교회마다 목회자와 교인, 장로와 교인, 교인과 교인, 목회자를 둘러싼 다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 70%이상이 이를 경험했다. 심지어 사회법정으로 다툼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법정에서 잘잘못이 가려졌음에도, 다툼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라. 다툼으로 인해 연합단체가 분열되고,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로 인해 교단이 분열되고, 목회자의 잘못으로 인해 교회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 이런 사실 앞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특권을 누리기 위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은, 교회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자이다. 교회는 자기 욕심을 누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곳이다. 우리의 생각과 뜻을 드리고, 몸까지 바치는 곳,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곳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

사도 바울의 말이다. 초대교회는 이런 원칙을 지켰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살았다. 로마제국 시대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하기 이전까지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고,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었다. 고리대금을 일삼는 귀족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투쟁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회가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실천적 봉사와 노력이 교회의 선교에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운 교회공동체가 타락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권력과 결탁해서 부자교회가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 농민, 병신 등과 등을 지었다. 과거의 교회나, 현재의 교회는 이들과 함께 사귀고, 나누고, 함께 했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깨달아야 한다. 루터는 라틴어로 된 성서를 읽기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누구나 읽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성서를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례 할 목사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오늘 교회의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교인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설교, 성례전, 성서교육을 책임지는 전문적 교역자이다.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아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원형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복음을 헐값으로 뿌리며, 성령을 도매금으로 방매하지 말라
종교개혁 499주년 한국교회에 길을 묻다(2)…그리스도의 올바른 삶

성령을 도매금으로 방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 교회를 찾아볼 수 없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럼에도, “이것이 진짜 교회이다”, “이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마디로 성령을 도매금으로 방매하는 목회자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수백억원, 아니 수천억원을 들여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하고 있는데,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탑은 우뚝 솟아 있는데,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역사의 현장에 교회가 없다는 말로 들린다. 즉 이것은 복음을 헐값으로 뿌리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세상 사람들은 아니 기독교인들은 한국교회의 모든 현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 정말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수없이 서 있는 첨탑, 수백억원, 아니 수천억원을 삼키면서 버티고 있는 예배당의 건물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일까? 그곳에 다니는 교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묻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교회이다. 이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계실까?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타락한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행동하지 않는 교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깃들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가시밭 길과 벼랑 끝을 헤매셨는데, 또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지금 그 분은 어디에 계실까?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보이지를 않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역경은, 오늘 타락해가고 있는 교회에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예수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 행동하지 않는 교회를 보면, 옳은 말인 것 같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가 가는 그곳에 교회도 간다고 말해야 옳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맑고 깨끗한 마음과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탐욕으로 가득한 충혈 된 눈으로, 허위의식으로 가려워진 눈으로는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기 위해서 역사의 흐르는 물줄기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이 활동하신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라. 시끄러운 소음소리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현존하시면서,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전 한신대학교 박재순 교수는 자신의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예민한 청각을 가지라”고 했다.

교회마다 시끄럽다. 그것은 교인과 교인, 목회자와 교인, 교회와 교회, 교단내부와 연합단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청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을 신으로 만들어버린 교회의 강단에서 연일 ‘돈의 소리’만 들려온다. 심지어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라고 말한다. 타락한 중세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심지어 ‘영적’이란 이름아래 목회자가 교인들을 성폭행하는 등 교회 안에서 윤리적인 타락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더 이상 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차마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기가 힘들다. 또한 교권주의와 교파주의, 그리고 집단이기주의에 만연된 나머지 분열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단이 무려 300여개가 넘는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행동하는 교회가 되라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희망을 걸지 않는 이유도 바로 교회가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서에 나오는 1달란트의 받은 종의 모습이 아닌가? 성경 마태복음 25장 22절부터 30절의 말씀은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이 성경구절은 말해 주고 있다.

달란트 비유나, 열처녀 비유는 모두 하나님나라와 대심판에 대한 이야기이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집 없는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고 심판이 내려진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가 이들을 위해서 얼마만큼 행동을 했는지, 되묻고 싶다. 이들을 멀리하면서, 한국교회는 벼랑 끝에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갇힌 자, 병신, 떠돌이, 노숙자, 거지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나몰라 하고 있다.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가 나누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의 비유를 들며, 너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처음 전파된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데 모두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본질을 잃어버린 채 홀로 모든 것을 독식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교회는 주여! 주여! 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과 등진 교회가 되었다. 예수님의 하나님운동과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전혀 다르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것은 한국교회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부자들의 입맛에 따라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는 경쟁에 열을 올렸고, 교회당을 호화롭게 장식하는데 바빴다. 그리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떠안은 빚을 갚기 위해 중세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했듯이, 교인들을 향해 믿음의 척도를 헌금액수,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뱉는다. 싸구려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 안에 하나님 대신 맘몬신과 바벨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중세교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 일에 전혀 참여하지를 못하고 있다. 아니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참여하지를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결단해야 한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공동체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교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성서는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1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행동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을 회피하며, 세상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으로 믿고, 불의한 사회와 잘못된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기 위한 변명이다. 아니 허구이다.

박재순 박사는 “하나님의 전능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희망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전능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염원에 답하는 시대적 사명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현재에 안주하며, 자신이 속한 교회와 자기 자신에게 더 충실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죽음의 세력에 의해 우리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우리의 이웃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이것이 보수신앙인가?

행동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허구적인 신앙에 빠져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기에 바쁘다. 이제 교회는 맘몬과 바벨에 길들여진 나머지 하나님은 성전 하나님, 예수님도 성전 예수님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보니 교회 안에서는 연일 목회자를 둘러싼 다툼이 일고 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연합단체를 둘러싼 법정다툼, 교단을 둘러싼 다툼 등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에 있어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보수적인 연합단체가 크게 둘로 쪼개지고, 그것도 모자라 해마다 “합친다, 만다”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결론이다. 내가 받은 진리와 신앙을 지키고만 있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수적인 목회자들의 추상적인 복음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는, 타락한 중세교회보다도 못한 길을 걷고 있다.

성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 재물을 잃는 것과 같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자기가족을 위해, 자기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준 달란트를 다 허비하는 사람과 교회는 하늘의 가족을 잃는다고 했다. 교리나 전통적 신앙만을 붙잡고 안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삶은 비록 삶이 고달프고, 위험할 지라도, 용기 있게 예수님과 하나님나라를 향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논두렁, 서울역, 노동현장, 떠돌이, 다문화가정 등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이 진정 화해와 해방의 복음이라면, 그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깊은 남북분단을 극복하는 복음이어야 한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붕 위에 있지 않고, 가장 적대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남북분단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교회이며,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하고,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적게 행동하려고 하는 등 행동 없는 삶에 빠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행동해야 한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그들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들 속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가난한 이웃의 ‘한의 소리’를 외면한 교회 희망 없다
종교개혁 499주년 한국교회에 길을 묻다(3)…생명의 존엄성을 가지라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생명의 존엄성에서 이탈된 말들을 자주 내뱉는다. 문제는 생명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외쳐야 할 목회자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 뱉는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고 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세월호가 일어났을 당시 일부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예수님을 믿은 아이들은 괜찮은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아이들은 지옥에 갔을 텐데…”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내 뱉었다. 한기총의 한 인사는 “기차나, 버스타고 불국사로 여행을 갈 것이지,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세월호를 타고, 여행을 가다가 이 같은 사단을 일으켰냐”고 막말을 내뱉어 국민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이와 비슷한 말들이 요즘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중 하나가 “배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는데, 이렇게 난리를 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한 기독(민주당)이 세월호 희생자와 6·25 참전용사를 비교하며 ‘6·25참전용사들은 최고 10만원 약값 지원받고, 세월호 애들은 최고 대우받고, 나라를 위해 죽은 자 거지취급 당하고 여행가다 죽은 자 황제 대우 받는다’는 내용의 플랜카드를 내 걸었다.

이 같은 내용들은 한마디로 “잃어버린 생명 하나를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과 등진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목사들의 입에서 할 말은 아니 것 같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벼랑 끝으로 내 몰렸는데,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니셨는데, 어떻게 참담하게 죽은 아이들을 향해 이 같은 말을 내 뱉을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한국교회 안에 종교적, 개인적 이기주의가 가슴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목사가 자기부인을 죽여 암매장하고, 신학대학교수가 자식을 때려 숨지게 하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싸구려 복음을 전하며, 성령을 방매하고,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한,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자기개혁은 고사하고, 낡은 철갑을 더욱 죄어 매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 같은 잘못을 깨달은 의식 있는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는 노동자를 비롯한 농민, 떠돌이,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대신 그 자리에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자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이들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곧 ‘돈’이 ‘신’이 되었다. 교인들은 돈으로 하나님나라 티켓을 구입하는 결과를 연출하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나라의 척도, 구원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말한다. 이렇게 타락해 가는 한국교회도 중세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다. 누구도 한국교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하비 콕스는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고 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이런데도 한국교회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타락해 가고 있다.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희망 없는 교회에 철거민과 노동자, 농민, 떠돌이, 병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던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지녀야 할 하나님의 공의와 인권, 그리고 평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약자와 소수를 대변하고, 차별과 분리를 거부하며, 가진자와 배운자, 그리고 자산가와 기득권의 반성과 사회적 환원과 정당한 역할을 강조해야 할 교회가 침묵하고 있다. 스스로 교회의 가치와 정체성을 무너트려 버렸다.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린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세례를 주며,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최소한도 겉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인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땅의 보수적인 일부 목사들은 자기성, 자기확대를 구축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교회를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인 자기개혁의 길을 망각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최소한도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프로테스탄트의 생명인 자기개혁과 교회개혁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개혁과 교회개혁을 망각한 교회의 모습 속에서 생각해서는 안 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교인 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말하기 쉽게 “이단단체가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철저하게 한국교회가 문제의 단체로 지적한 이단단체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상처를 입은 교인은 자신의 명에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목사는 소송을 제기한 교인을 출교처분을 내린다. 이러한 사건은 이천의 D장로교회, 강동의 M교회, 부천의 Y교회 등등에서 일어났다. 이 같은 사건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단단체를 이용한 것으로, 목회자들에게 자기개혁을 강력히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천의 Y교회 목사는 자신의 혼외자식을 감추기 위해 이단단체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세상과 교회에 알려지면서, 혼외자식을 둔 목회자들의 면면이 들어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오히려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들이 나서서 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단체는 교권과 교리적으로 아니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가식적이든 아니든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도 이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한다는 것이며, 교인들과 소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자와 소수를 대변하고, 차별과 분리를 거부하며, 가진자와 배운자, 그리고 자산가와 기득권, 병신, 떠돌이,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을 모두를 거부하지 않고, 이들을 끌어안는다는 것이다.

이웃교회와 함께하는 그리스도공동체

종교개혁 499주년을 맞았다. 영미교회들이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정치와 경제에 관심을 갖고 교회를 세속화시키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역시 권력과 밀착되어 많은 이권을 챙겼으며, 하나님나라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라고 부르짖으면서 쇄락의 길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미천하고,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한의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서양문화로 대변되는 기독교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교회가 타락한 영미교회의 전철을 밟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을 자를 택하셨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명시당하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하셨다…(고린도전서 1장27-28절)”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의 체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 성경구절은 역사의 주인공이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벌였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영미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는 성서의 정신으로 돌아가 위치를 의식하고, 자기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동안 쌓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성서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년 만에 1천만명이 넘는 교인을 만들었다.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였다. 이제 한국교회도 영미교회와 마찬가지로 200여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있다. 가진자들의 기득권에 눌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신, 떠돌이, 노동자, 농민 등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향해 기득권을 내려놓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를 좌지우지 하며,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대다수는 역대정권과 타협하며, 그 비호아래 성장했다. 이른바 근대화라는 바람에 휘말려 본향을 잃은 수많은 피난민, 이농인구들이 다급하게 찾아간 곳이 교회이다. 이들은 교회성장의 주체였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저들에게 걷은 헌금을 가지고, 수십억, 아니 수백억, 수천억원짜리 교회당을 짓고 버스를 사들여 교인쟁탈전을 벌였다. 우스운 것은 이것이 응분의 권리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교회성장의 주체였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교회는 민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막았으며,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비호하는데 앞장섰다. 그것은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는데도, 국민들의 절규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비호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선교초기 모여들었던 피압박민족, 3.1만세운동 당시 총동원되어 외쳤던 그 과제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뿌리인 예수님과 그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님만을 고수하던 이스라엘 신앙에로의 회귀의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무게의 중심을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 놓아야 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 모두가 기득권을 가진 주류에 저항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보수성은 주류에 가담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주류란 바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권력의식이다. 주류가 내세우는 교리는 싸움에서의 승리로 얻은 권력이지,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소위 오늘 한국교회가 정통을 운위하는 것은 주류에 충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주류는 정통성의 담지자로 자처

주류는 정통성의 담지자로 자처하면서, 그 권리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군림했다. 그 밑에서 참진리는 침묵 당했다. 많은 진실과 양심들에게 이단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처형했다. 처형권이 없는 교회는 다른 형태로 그대로 행했다. 예수님은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과 활동하셨고, 이들을 위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중세 로마교회는 성서를 차압하고, 진실을 차단했다. 루터는 저들에 의해 이단자로 추방됐다. 그러나 루터나, 스위스의 정권을 손에 넣은 칼빈 자신도 ‘성공’과 더불어 주류의식에 사로잡혀 이단자를 규탄하고, 처단하면서,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의 절규를 저주했다. 한국교회 역시 방법과 정신이 어찌되었건, 승리자의 편에 서는 것을 진리 옹호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성취해야 한다.

또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미국도, 서구도, 팔레스티나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이다. 그 사실을 재확인하고, 오염된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기독교가 그리스를 거쳐 유럽과 미국에 들어와 그들의 표현대로 정착했듯이, 우리도 우리대로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현장에서 우리의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표현하면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더 이상 한국교회도 영미교회를 매개로 해서 예수님을 만날 이유가 없다. 우리의 감정을 저들의 문화와 가락으로 표현할 이유도 없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제국주의 신학과 신민지 신학,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적인 신학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살 수 있다.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존재 없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야만,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민족을 살리는 종교가 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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