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가 떨어진 세상

정유년 새해를 맞는 한국교회는 분명 새로워져야 한다. 정유년 새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교인 모두는 기대한다.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포도주가 떨어진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 성서는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이며,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포도주의 기적은 돌덩어리로 변해버린 인간의 마음에 많은 감동을 준다. 예수님의 포도주 기적은 잔치집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가 주었다. 또 잔치집 분위기를 흥겹게 해 주었다. 예수님은 세상에 슬픔과 고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가져다가 주었다. 가나의 결혼잔치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요한복음 2장1-12절)

이 성경구절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성경말씀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으면서도, 그 사회에 주어진 말이다. 예수님 당시 결혼 관습은, 신랑집에서 7일 동안 잔치를 열어야 했다. 들러리들은 신부를 기다리는 7일 동안 신랑은 손님을 접대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신랑에게 부끄럽고 슬픈 일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포도주가 떨어지진 모습이다. 교인들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내 가슴에 사람과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분명히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보다도 목회자와 교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참된 감동을 잃어버리고, 골방에 앉아 허공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운동경기나, 텔레비전 연속극, 격투기를 보면서 감동한다. 하지만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기뻐하고, 울지를 못한다. 그만큼 마음이 차가워졌다는 것이다. 아니 돌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농민이 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생존권을 요구하던 농민이 공권력에 의해 숨지고, 자식을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하고, 그 진장을 밝혀달라고 2년 동안 차가운 길바닥에서 외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한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최태민 목사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수백만의 시민들을 향해 ‘빨갱이’, ‘용공분자’, ‘좌경분자’로 몰아붙이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모습은 참담하다 못해 안타깝고 부끄럽다. 

▲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린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마음이 돌덩어리로 변한 세상

오늘 우리가 주말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교회공동체의 일원들은 왜 울어도 같이 울 줄 모르고, 피리를 불어도 함께 춤을 추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마음은 콘크리트처럼 딱딱해졌다. 아스팔트처럼 메말라 버렸다. 이것은 분명 교회가 세상을 향해 열려 있지를 못하고,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가슴이 돌로 변한 결과이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고 악마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이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찌되었건, 윤리, 도덕이 어찌되었건 먼저 먹고 보자는 식이다. 그래서 교단장 선거와 단체장 선거에서 돈이 뿌려지고, 향응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여성교인들에게 성령이란 이름아래 몹쓸 짓도 서슴지 않는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악마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가슴이 딱딱해진 것이 아닌가(?) 우리의 마음에 영혼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영혼의 포도주가 가득하다면, 이 사회에 정신적인 포도주가 넘쳐난다면, 우리사회는 훈훈하고, 생명력이 흘러넘칠 것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은 생기 있는 삶으로 변화될 것이다.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라는 것은, 사랑이 없는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웃을 사랑 할 줄 모르는 시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도 만나게 되고, 인간도 만나게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행동해야 한다. 또 하나님은 사랑 속에서만 자신을 나타낸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박재순 교수는 성서 요한1서를 인용,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인간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본모습대로 살려면,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랑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세상 불행

오늘 이 시대는 서로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다. 텔레비전 연속극과 유행가 가수들의 입에서는 빠짐없이 사랑을 노래하는데, 왜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사회와 교회는 왜 사랑을 상실했는가(?)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물은 분명 맑은 물이어야 한다. 깨끗하지 않은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욱 심하다.

이처럼 조건적인 사랑, 계산적인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구해주지를 못한다. 조건적인 사랑은 마실 수 없는 물과 같다. 인간의 영혼을 더욱 갈증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계산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랑이 바로 아가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이를 행동으로 보이셨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 아버지의 사랑은 아가페사랑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을 헤매셨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대로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은 분명 계산하지 않은 사랑이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 준 그리스도의 사랑,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이런 사랑을 잃어버렸다.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다. 계산적인 사랑은 고인물과 같이 썩고 만다. 요즘 거리에는 촛불이 넘실된다. 서로는 모르지만 마음과 마음이 부딪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촛불민심은 불꽃이 되어 번져 나가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이 불꽃의 위력 폄하해 버린다. 촛불은 촛불일 뿐,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국민들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빨갱이’, ‘좌경분자’로 몰아부친다. 한국교회 안 하나님의 사랑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천박한 목소리만 토해내는 목회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은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짐승들도 하지 않는 짓을 하게 되었다. 자식들이 부모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시대, 이웃집에 새들어 사는 사람이 죽었어도, 한 달이 넘도록 모르고 사는 시대, 이는 분명 사랑의 포도주가 떨어져 인정공동체가 파괴된 시대이다.

인정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진다. 이혼율도 높아지고, 목사가 존속 살인하고, 동성애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목회자들의 입에서 천박한 목소리만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의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 아가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예수님은 항상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둔 긴박한 삶을 살았다. 또 항상 하나님의 때를 의식하며 살았다. 때의 엄숙성 속에서 살았다. 촛불시위로 어수선한 나라에 언제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인가(?) 국민들은 이를 생각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것은 새로운 나라를 향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가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민족의 염원인 분단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또 자식을 물에 수장시키고, ‘자식의 한’을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예수님은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고 했다. 그래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짐승처럼 자식이나 낳고, 가정이나 꾸려가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먹고 자고 싸는 생활밖에 못하는 사람들이, 돌항아리 같은 인간들이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인간들로 변하는 기적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골방에 홀로 앉아 허공에 대고 기도를 드린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골방에서 나와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와 교인들은 욕심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비워야 한다. 내 마음 속에는 욕심과 증오, 게으름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대의 항아리에서 폭력과 부조리, 증오와 용심, 귀신을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말씀의 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그리하면 때를 분별하는 신앙을 얻게 된다.

맹숭맹숭한 물이 기쁨을 주고, 향기를 토하는 포도주로 변하듯이, 우리 속에 있는 말씀과 지식이 실천적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고난 받는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신,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남북통일과, 오방과 악령으로 가득 찬 나라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길목에서 하나님나라를 기다릴 수 있는 진실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정유년 새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교회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이 벌인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이며,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수 있다. 또 민족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다.
/유달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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